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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Oct 10. 2024

10월, 하늘

뼈와 살을 키워주고 마음을 살찌워 준 고향 하늘


10월은 하늘과 함께 왔다. 발끝까지 내려온,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린 하늘과.


해가 돋을 무렵, 숲을 걸었다. 키 큰 나무들은 한 걸음씩 물러나며 길을 내주었다. 숲길, 정갈한 숲길에는 잠이 덜 깬 아침이 몸을 구부리고 늘어져 있었다. 갈무리해 둔 고요를 어찌할 거냐고 물으려 할 때, 제 몸을 흔들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꼭대기를 흔들어 채 일어나지도 않은 아침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얼굴을 비비며 얼떨결에 마을로 내려가는 아침. 누군가는 아침이 오는 것을 기다렸을까. 10월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어둠의 한가운데서 파수병처럼 오롯이  있었을까.


9월, 우리는 9월이 아닌 9월을 지나왔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짜증을 부렸다. 햇볕이 무섭다고 토악질했고, 망에 담긴 배추 앞에서 치를 떨었다.

9월은 여름을 닫고 가을을 연다. 올해는 특이하게 여름을 닫지 못했지만, 9월은 새로운 시작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명리학에서는 9월을 토土의 개념으로 본다. 8월의 기운을 받아 10월을 준비하는.


10월은 그런 9월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왔다. 숲 속에서 빠져나오는 아침처럼. 나무가 꼭대기를 흔들어 내보내는 아침처럼. 10월은 분명 9월과 함께 있었을 테지만 바람이 달랐고, 햇볕이 달랐다. 사람들은 그런 10월을 기다렸고, 10월은 홀연히 왔다.


10월은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섰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을 청군, 백군으로 나누놓았다. 흰옷을 입고. 파란 모자를 쓰고 달리고 소리치는 아이들. 하루쯤 일손을 놓고 사랑이 담긴 도시락을 싸들고 나무 밑에서 바라보는 부모들. 축제라는 말은 없었지만 축제였다.

가을 무를 넣고 자작하게 조린 갈치조림은 왜 그렇게 맛나던지. 공책 한 권씩 받아 들고 누렇게 익어가는 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들도 어른들도 신나는 걸음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른데도, 나뭇잎은 화려한 옷을 장만하고 있는데도 요즘의 10월은 재미가 없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신이 나지 않는다. 갈치조림을 들고 운동장에 가야 할 부모들은 골프장으로 커피숍으로 간다.

들판은 누렇게 익어가건만 메뚜기는 날아들지 않고, 들길에는 가녀린 햇볕만 가득하다.


그래도 10월은 바람과 함께 온다. 9월의 숲에서 자라고 9월의 손에 키워진 바람은 미련 없이 10월을 향해  돌려버린다. 들판의 곡식은 9월의 햇볕으로 익어왔건만 10월의 바람이 들판을 흔들어 황금물결을 일으키면 사람들은 모두 10월을 향해 달려간다. 손바닥을 뒤집듯이 한순간에 생각을 바꾸어 버린. 사람들은 그렇게 10월을 맞는다. 그렇게 9월을 잊는다.


10월이 내놓는 것은 파란 하늘이다. 단풍을 몰고 올 바람이 하늘을 씻어놓으면, 씻긴 하늘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마음을 얹는다. 9월을 잊은 마음을, 탐욕이 되기 십상인 마음을.


우리는 이희승 님의 시조 벽공(碧空)을 소환하게 하는 10월을 지나고 있다. 푸르른 하늘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10월을 맞이하고, 10월에 함몰되어 휘청거린다.


벽공碧空

                    이희승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10월은 하늘과 함께 눈 시리게 살아 있다. 청정무구(淸淨無垢) 드리우고 살아있는 게 10월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대로 10월을 맞이하지 못한다. 푸른 하늘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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