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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Sep 10. 2024

31화 9월, 햇볕.

명리학의 진토辰土같은

오산 독산성의 성벽, 말간 9월의 햇볕이 내리는



파리하게 9월은 왔다. 팥죽 냄비처럼 끓던 8월의 발길질에 차인 탓일까. 9월은 제 몸을 드러내지 못한다. 형체가 없지만, 성질도 없다. 8월이 아니라고 내동댕이치건만, 8월의 더운 입김을 떨치지 못했다. 10월처럼 '어느 멋진 날'을 내놓지도 못한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이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그러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노랫말 같은 건 감당 못할 사치다. 분명한 허영일뿐이다. 9월은 그렇게 흐리멍덩하다. 늙은이들의 시간처럼.


태풍이 세상을 쪼개고 가르며 으르렁거리고, 그만큼 비를 쏟아내며 악마의 발길질을 내지르는, 그 위에 마그마 같은 폭염을 퍼붓는 8월의 뒤끝으로 걸음해야 하거늘.


9월은, 얼떨결에 내려와 버린 9월은 무채색의 그림처럼 그냥 밋밋하다. 마치 나 같은 늙은이의 낡은 페이지와 다를 바가 없다.


권율 장군의 호국의지가 남아있는 독산성 낡은 성벽을 늙은이 둘이서 걸었다. 9월의 첫날, 성벽으로 내려앉는 햇볕을 따라.


ㅡ물빛이 변했어.

4년 만에 만나 같이 염소탕을 먹은 친구가 말했다.

ㅡ그렇겠지?

마주 앉아 먹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ㅡ저 햇볕을 봐. 저 가을볕을.

소나무 그늘에 숨으며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친구 손에 쥐어 주었다.

ㅡ아는구나. 가을이 무엇으로 오는지. 

국문과를 다닌 감성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친구. 그는 시커먼 남자들의 소굴인 공대에서 하늘을 보았고, 바람을 느끼며 젊음을 키웠다.

ㅡ9월은 분粉내가 없어.

ㅡ다소곳이 빗은 머리도 아냐.

우리는 9월을 조롱하고 희롱했다.


ㅡ그래서 좋아.

ㅡ버림받은 듯해서?

ㅡ은근하잖아.

ㅡ깊이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물빛.

ㅡ말간 햇볕.


돌이켜봐요 지나간 9월

그 시절의 달콤한 추억

돌이켜봐요 순진한 그 시절

꿈이 아롱지는 계절


50년이 지났어도 남아 있는 노랫말. 톰존스의 희곡 '철부지들 The Fantasticks'.

무대에서 우리는 참 볼품없는 연기로 9월이 남긴 추억을 더듬었다. 스무 살의 뛰는 가슴으로는 허공만 휘저었을 뿐이다.


ㅡ9월이 추억을 만들어냈을까?

ㅡ그때, 우리는 세상을 몰랐었지.

ㅡ맞아, 우리는 말간 햇볕을 보지 못했어.

ㅡ물빛이 변하는 건 알았고?


우리는 힘을 합해 '철부지들'을 망가뜨렸다.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우리는 벨로미와 허클비라는 '아버지'의 흉내를 냈지만, 끝내 9월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9월의 실체를 모른 체 무대에서 쿵쾅거렸다. 연극을 망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ㅡ구름이 어진 게 9월이 오기는 왔네.

하늘만 바라보던 친구가 소나무 그늘 밖으로 걸어 나갔다.

ㅡ적란운이지?

ㅡ맞아, 쎈비구름. 거짓말같이 사라지겠지.

ㅡ9월이니까.


성벽 위에서 서성거리는 구름. 아직 8월이 남아 있는 걸까. 한 마리 백마가 하늘을 날고 있다. 권율 장군이 말을 씻겼다는 세마대洗馬坮. 그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 모습일까.



겉으로 밋밋해도 9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하늘을, 햇볕을, 바람의 끝을 돌려세운다. 무너진 마음을 일으킨다. 여름을 견뎌낸 과일들을 품어 과육의 살을 찌우고, 꼿꼿한 벼이삭을 보듬고 통통하게 영글 때까지 힘을 불어넣는다. 10월처럼 멋진 날을 가지지 못해도 10월의 멋진 날을 다져가는 게 9월이다. 자식 앞에 선 부모처럼.


ㅡ힘이 많이 빠져나갔어도 끝까지 걸어가자고.

ㅡ걷는 채로 하늘까지 가버렸으면.

ㅡ우리 힘으로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으면.

ㅡ그래야지.


9월, 햇볕은 말갛고, 바람은 가을을 장만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늘을 바라봤다. 9월을 맞고 있었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진토辰土 같은 9월을. 늙은이들 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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