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캥거루kangaroo 수니. 엄마, 엄마였던,
오크베일 와일드라이프 공원Oakvale Wildlife Park에서 수니를 만났다. 수니는 참 쉽게도 곁을 내주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먹이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다. 정말 오독오독. 그 소리가 마음 깊이 들어왔다. 다섯 살 즈음의 손자가 내가 주는 과자를 깨물어 먹던 그 소리. 참 마음이 편안해지던 그 소리를 이렇게 가깝게 들을 수 있다니. 듣기만 해도 배가 부르던 그 오독오독 깨무는 소리를.
그때 오독오독 깨물고 있는 수니의 입을 보았다. 그 작고 앙증맞은 입.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던. 그리고 그 입 속에 감추어 놓았다가 내 손바닥 위에 부드럽게 올려놓던 여리디 여린 혀.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나누었다. 먹이를 주는 손과 그걸 받아먹는 혀로. 그렇게 우리는 소통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마음이 통한 게 아니고 먹이 때문이었으니까.
캥거루는 순해 보이지만 힘이 세고 때로는 공격적이라고 했다. 그의 발에 차이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발톱에 찢길 수도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마음으로 일어서려는데 수니가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 눈.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순전함이 가득하였다.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오독오독 깨물어 먹던 그 작은 입과 손바닥에 내려놓던 그 부드러운 혀가 모두 수니의 눈에 담겨 있었다. 수니의 눈과, 눈길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부드러움, 선하디 선한 느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그에게 수니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다.
ㅡ캥거루는 보이는 것과 달리 공격성이 강하다는데, 수니 너는 어쩌면 이렇게 고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거니?
모든 것이 일반화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캥거루가 공격적일 수는 없을 테고, 캥거루가 언제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덤벼들지 않는 이상 발길질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있어서 제 키보다 낮게 보이지 않는가. 캥거루가 덤벼들면 몸을 낮추라고 했다. 자기보다 키가 작으면 상대방이 싸울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덤비지 않는다고. 캥거루는 그렇다면 공격적이 아니고 자신을 지키려는 습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오색에서 대청으로 오르는 길은 참 가파르게 이어진다. 설악폭포를 지나 다리 쉼을 하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다람쥐 한 마리가 저만치에서 바라보고 있다. 언제부터 다가왔을까. 이 아이는 내가 먹고 있는 옥수수만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만 먹고 있는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옥수수 몇 알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쪼르르 다가온다.
ㅡ한 알만 물고 가면 안 돼, 천천히 먹고 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먹는가 싶더니 이내 손가락에 두 발을 올려놓고 먹는다. 그의 발가락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작고 작은 발가락. 어린 시절에 병아리를 손바닥에 올려놓았을 때의 그 느낌. 그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가운데서 느껴지는 은근한 날카로움. 그 느낌이 좋았다.
먹이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내게 다가와 준, 내 손바닥에 자신의 발을 올려 놓아준 다람쥐.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이을 수 있었다.
ㅡ아예 손바닥 위에 올라앉아서 먹어 봐.
어느 정도 먹었는지 이 친구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지그시 바라본다.
ㅡ가겠다는 인사인가.
그 맑은 눈길을 남겨 놓고 다람쥐는 총총걸음으로 돌아섰다.
동물의 뛰어난 감각일까. 먹이에 대한 본능일까. 아무리 먹이에 대한 탐욕이 있다고 해도 자신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에 다가왔을 것이고 보면 동물은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반려견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개는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놀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나면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재밌는 것은 같이 걸어오는 친구에게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설악에서 만났던 다람쥐, 어린 시절 같이 뛰어놀던 개를 생각하며 수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니는 엄마였다. 주머니 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수니의 아가. 아, 그래서 그렇게 부드러웠구나.
ㅡ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들었다.
류시화 작가의 책 제목이 생각났다. 이 말은 엄마 입장에서는 좋게 들릴 말이 아니다. 오직 엄마의 희생으로만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지만 언제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은가. 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날 얼어붙은 개울의 얼음을 깨고 맨 손으로 가족들의 빨래를 하던 어머니, 닭 한 마리 잡아서 열 식구 그릇에 담아 놓고 껍질만 붙은 닭발이나 먹던 어머니, 하루 종일 품앗이 일을 하며 새참으로 나오는 찐빵 한 개를 가져와 자식들에게 먹이던 어머니.
신은 왜 어머니만 만들었을까. 아버지도 좀 만들어 놓지. 어느 작자님의 글을 보았다. 남편이 불치병에 걸렸단다. 시력이 안 좋아서 집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못 보고, 귀가 들리지 않아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판단력이 떨어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이 귀한 것인지 모르는. 그래서 평생을 자기가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는.
수니는, 주머니에 아이를 넣고 다니는 수니는 어떤 엄마일까. 아이에게 잘못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꾸며낸 얼굴일까. 순한 척 보이려는 가식의 행동일까. 아닐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눈망울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엄마의 마음이고 엄마의 행동일 게 분명하다.
다시 사료를 한 주먹 꺼내 수니에게 내밀었다. 수니는 역시나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먹이를 올려놓은 손을 주머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아이에게 가져갔다. 아이는 먹어보겠다고 입을 내미는데, 수니는 깜짝 놀라며 몸을 틀더니 저쪽으로 성큼성큼 뛰어가버린다. 멀어져 가는 수니를 바라보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새벽마다 내 가방을 들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셨던 어머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