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포트 스테판Port Stephens을 즐기는 방식
포트 스테판Port Stephens 1일 투어는 달링하버 여객선 터미널 부근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한다. 우리가 예약한 여행사는 대한관광여행사. 버스 승차 장소는 Sealife 수족관 건물 옆(1-5 Wheat Road, Sydney)이다.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이다. 패키지여행에 익숙한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를 했는데 아이들은 일어나지 못한다. 서두르고 재촉하여 약속 장소에 6시 45분에 도착했다.
ㅡ오늘 투어는 시드니 북쪽으로 세 시간 넘게 달려 Port Stephens 지역을 돌아보는 투어입니다. 돌고래 탐사 투어, 점심, Sandboarding, 동물원(정확하게 말하면 오크베일 와일드라이프 공원Oakvale Wildlife Park)을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운전사 겸 가이드님이 능숙한 말솜씨로 일정을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창밖으로 향한다. 시내를 벗어나자 4차선 도로가 이어진다. 도로를 따라 나그네의 마음도 이어진다. 객창감. 쓸쓸함이 더해질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여행을 오롯이 느끼려면 자기만의 걸음을 걸어야 하고, 거기에 조금씩 쓸쓸함이 더해지고 어느 순간 낯섦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때 무아지경까지는 아니어도 두고 온 속俗한 세상을 떨쳐내게 된다. 좀 웃기는 게 다른 사람들이 무리 지어 살고 있는 세상에 있으면서 속俗한 세상을 떨쳐냈다고 말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참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내가 발버둥 치고 있는 세상을 잊을 수만 있다면 그곳은 그야말로 신세계가 아닐까.
창밖으로 아름다운 시골 풍광이 이어진다. 나무 울타리 너머로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보았다. 한가롭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우리의 삶의 시간도 저렇게 느릿하고 여유롭게 흐른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쁘게 살아왔다. 나를 키우기 위해 30년을 동동거리며 살았고, 자식들을 건사하기 위해서 30년을 숨 가쁘게 살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오직 나만을 위해 여유를 즐기며 좀 늘어져서 살아야 한다.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남은 시간은. 여적餘滴이라는 말이 있다.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말한다. 이제는 그 남은 먹물로 글이 아니고, 그림이 아니어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붓질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 이게 무슨 글이냐고, 무슨 그림을 이렇게 그리고 있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그냥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한 번씩 웃어주면 되지 않을까.
ㅡ돌핀 크루즈에 승선할 건데, 오늘 손님들은 돌고래쇼를 볼 것이고, 그 쇼는 참 환상적일 것이며 여러분들은 탄성을 자아낼 것입니다. 어젯밤 신의 계시를 그렇게 받았습니다.
돌핀 크루즈의 2층 갑판은 따가운 햇살만 가득했다. 이제 막 걸음을 떼고 있는 봄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벌써부터 한 여름을 흉내를 내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까지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고, 옷깃을 여미며 웅크렸던 호주 사람들은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탓이라고 걱정하고. 자칫 봄이 없어지면 어떠냐고 걱정하고. 어딜 가나 온난화 이야기이다.
배는 타루아 강인지, 포트스테판스만Port Stephens Bay인지 어귀에서 멈칫멈칫 어슬렁거리고 있다. 1층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난간을 붙잡고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돌고래를 향해 투척할 환호성을 한 뭉치씩 움켜쥐고 저마다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여행의 한 단면이다.
2층 갑판은 나 혼자 남았다. 텅 빈 의자에 앉아 햇볕을 즐긴다. 봄을 시작하는 햇볕을 등으로 받아낸다. 은근한 즐거움이다. 등에서 뒹굴고 있는 햇볕의 체취를 온전히 느껴보는 시간. 돌고래를 향한 기대감보다 더 풍성한 마음으로 가만가만 즐기고 있다.
등에 내려앉는 햇볕이 엔간히 따가워졌을 무렵 느닷없이 <이방인>의 뫼르소Meursault를 생각했다. 그 햇볕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던. 재판에 넘겨졌고, 엉뚱하게도 총을 쏘았다는 사실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더 큰 쟁점이 되어버린. 그래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러나 끝까지 항변하지 않았던 뫼르소Meursault를 돌핀 투어 크루즈의 2층 갑판에서 소환했다. 모든 사람들이 돌고래에게 몰려 가버린 텅 빈 갑판에서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다. 돌핀 쿠르즈에 승선했으나 시류時流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갑판 위에 홀로 남아있는.
사람을 죽인 사실보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슬퍼하지 않았았다는 이유로 뫼르소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람들은 뫼르소의 이름을 점점 부르지 않는다. 직장 동료, 이웃, 거기에다 그의 연인까지도. 아무리 봐도 뫼르소는 사회와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떠밀려 난 이방인이다.
무리 지어 헤엄치고 있는 돌고래를 향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한 무리의 돌고래를 자신들의 세상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모든 것을 돌고래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2층 갑판에 홀로 남은 나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 돌고래가 바로 자신인 사람들. 이쯤 되면 나는 분명히 뫼르소가 아닐까. 이방인 뫼르소.
여행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가는 걸음이다. 보이는 것들이 모두 낯설고, 말을 나누되 소통하지 않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은. 긴장감이 찰랑거리는 듯한 홀로 걸음. 약간 배고고 서러운 듯한 느낌이 어행의 참맛이 아닐까.
4륜 자동차는 가볍게 모래 위를 달렸다. 바람이라도 한줄금 불어오기를 모두들 원했지만 창문을 넘어오는 바람은 이내 흩어지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저 멀리에서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내지르는 외침이 가라앉는 기분을 자꾸 일깨웠다.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는 김광섭의 "생의 감각" 한 구절이 생각났다. Sand Dune으로 가는 길. 모든 것이 멈추어 있을 때 발밑까지 다가온 파도는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주었다.
ㅡ사막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 폭우가 와서 주변에 웅덩이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햇볕이 강렬합니다. Sand Boarding의 참맛을 위해서 햇볕이 한 몫할 겁니다.
가이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굳이 우긴다면 사막이라는 단어를 내놓을 수는 있겠으나, Sand Dune은 좀 넓게 펼쳐진 모래 언덕이었다. 햇볕이 강하기는 했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행여 모래 바람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재미있는 건 맨발인데도 발바닥이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는 것. 그래서 모두 다 신기해한다는 것. Sand Dune은 해변에 펼쳐진 모래 언덕이었다. 그 모래 언덕에서 햇볕과 함께, 베트남 무이네의 White Sand Dune이랑 Red Sand Dune을 불러내었고, 속으로는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를 살짝 그려 보았다.
사진 찍기가 전부였다. 보드를 들고, 보드를 타고, 앉아서, 뛰면서 사진 찍기에 몰입한다. 어떻게든 사막처럼 보이게 하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댄다. 환호성을 지르고, 여기저기에서 장풍掌風을 날려 보낸다. 장풍에 날아가고, 혼자서 찍고,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는다. 연인끼리 찍고, 형제끼리 찍는다. 가족이 같이 찍고, 친구들이 어깨를 겯고 찍는다. 사진은 여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사진 찍기 위해 여행을 한다.
모래 언덕 아래까지 바다는 다가와 있었다. 거대한 파도까지 더불고 바다는 발밑에서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다는 모래 언덕을 이기지 못한다. 모두들 바다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고래 투어에서는 오직 바다만 존재했었는데. 아, 사람들의 간사함이란.
바다를 보고 앉았다. 톰행크스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가 생각났다. 그가 윌슨이랑 같이 살았던 모래사장을, 그리고 그의 외로움을. 어쩌면 인간은 그렇게 외로운 존재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빠져드는데 손자가 옷깃을 잡아당긴다.
ㅡ할아버지, 보드 타러 가요,
ㅡ그래, 가자.
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갔다. 속도가 빨라지고 저절로 외치고 있었고. 선블록을 잔뜩 발라야 했던 햇볕 따위는 생각도 안 날 정도의 쾌감이었다. 70이 되어도 쾌감은 쾌감이었다. 보드를 들고 모래 언덕을 올라간다. 발이 모래에 빠지고 그만큼 허벅지가 팍팍하다. 그래도 올라간다. 아니 올라가야 한다. 보드와 함께 즐기는 쾌감을 누리기 위해. 그러나 이내 싫증에 무너지고 말았다. 저 멀리까지 달아나고 있는 모래 언덕의 마루금, 그 뒤로 파랗게 내려온 하늘과 그만큼 하얗게 펼쳐진 구름. 아름다웠다.
손바닥만 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천막으로 들어가 모래 언덕을 즐긴다. 정말 사막처럼 보이는 모래 언덕. 모래 언덕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의 환호성.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벌이는 사진 찍기 행각. 그리고 햇볕.
ㅡ이렇게도 모래 언덕을 즐길 수 있는 거로구나.
돌려서 바라보면 여행은 몸으로 하기도 하지만,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보드에 앉아 모래 언덕을 내려오는 사람들과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모래 언덕을 즐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까.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두 번만에 싫증을 내고 그늘에 앉아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는, 나의 여행은 무엇인가.
ㅡ왜 아웃사이더가 되는 건데?
아내가 핀잔하고
ㅡ보는 것만으로 여행의 재미가 있거든.
이렇게 답하는데
어디에서 불어오는 건지 청량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