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인간은 어디까지 위대한가.
마음이 앞서 간다. 주왕산 입구에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저만큼 달려 나가고 있다. 나는 아직 상가도 빠져나가지 못했건만, 오래오래 품고 있었던 외씨버선길을 걷는 마음은 이미 주왕계곡 학소대나 신선대 어디쯤에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설렘에 젖어 여기저기 눈길을 흘리고 있는 나의 느린 걸음을.
주왕산 금은광이를 넘어서도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터라 살짝 긴장도 되었고, 단풍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대전사 뒤로 우뚝 솟아있는 기암에 한눈도 팔아야 하고, 요즘 내린 많은 비로 인해 제법 요란하게 흐르고 있는 주왕계곡의 거친 물줄기에도 눈을 주어야 하는 걸음은 나도 모르게 느려진다. 게다가 가는 비까지 내리고 보니 판초우의를 입을까 말까 선택의 기로에서 서성거리기도 해야 해서 이래저래 걸음이 늦다. 그러나 꼭 그만큼, 느려진 발걸음만큼 눈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주왕산의 말간 정기精氣를 흠뻑 받아들이는.
학소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음을 만난다. 학소대 꼭대기까지 한 바퀴 돌아왔다며 자랑하는 내 마음과 달리 우뚝 솟아있는 시루봉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칼로 두 쪽을 낸 것 같은 용추폭포 주변의 기암절벽 협곡으로 향해야 하는데, 골짜기에 우뚝 서있는 사루봉. 떡을 찌는 시루 같다는 시루봉은 정녕 사람의 얼굴이었다. 묘한 느낌을 받는. 양구 민통선 북방에 있는 두타연 폭포가 보여주는 연인의 얼굴과는 달리 오늘 시루봉은 깊은 고민을 안고 있는 듯하다. 운명일까. 어쩌면 실연失緣을 말하고 있는 걸까. 산길을 걸을 때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진다.
용추폭포 주변의 협곡을 빠르게 빠져나간다.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내지르는 사람들의 환호성. 이리저리 바위에 부딪치며 모든 것을 한입에 삼켜버리려는 계류의 볼멘소리. 용추협곡은 은근하게 감겨오는 낭랑한 물소리를 이미 내버린 터이다.
ㅡ산에 들어서 물소리에 흔들린다면 그게 산꾼일까.
아내가 쪼아댈 때 '열하일기'를 생각했다. 하룻밤에 아홉 번 물을 건넜다는 일야구도하기 一夜九渡河記. 외물外物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박지원의 일침. 그렇더라도 오늘의 용추협곡은 빠르게 지나가고 싶다.
외씨버선길은 깊이깊이 숨어서 이어진다. 깊은 골짜기로 한없이 숨어 들어가기도 하고, 산자락을 돌아가는 길은 휘휘할 만큼의 분위기를 보이며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경상북도 북부 산간지대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외씨버선길. 그래서 걸어보고 싶다는 산길, 마을길 거기에다 강변길. 나는 마음을 따라 걷기로 한다. 전 구간을 빠짐없이 완보하는 것도 하나의 걸음일 테지만, 어느 순간 멈추어 서고, 어느 마을에서 삶의 한 자락을 들여다보는 걸음걸음. 그렇게 느낌으로 외씨버선길을 걷고 싶었다.
용연폭포를 지나면서, 갑자기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에 싸여버리는 산길을 따라 금은광이로 오르면서 마음으로 걸어보는데 아, 마음이 아프다.
화마火魔였다. 온 산을 짓밟아버렸던 무서운 불길은 검은 주검만 남겨놓았다. 밑동이 까맣게 타버린 채, 그야말로 삶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소나무 아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불이 꺼지고 난 직후 외씨버선길을 살피려 걸었다는 객주지기는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무서웠다고 말했다. 오직 검은색뿐인 산자락은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래도 불에 강하다는 활엽수가 싹을 틔우고 푸른 잎을 피워 상당 부분을 가려 놓았다고는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빛의 행렬은 아름다울 숲을 참 처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날 주왕산 온천관광호텔 솔기온천에서 만난 청송 사람들은 그 악몽을 낱낱이 얘기했다. 청송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는 분은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3,000평 과수원 농사를 짓고 있는데, 150 주 정도의 사과나무가 불에 탔다고 했다. 사과나무가 불에 탄 것보다도 마음에 붙은 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량 2리 길가에서 들깨를 털고 있던 할머니는 말도 하지 마라고 손사래를 저었다. 동네분의 도움으로 차를 얻어 타고 '도망가는데'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그대로 불에 타 죽는 줄 알았다며 치가 떨린다고 했다. 80 평생에 그런 꼴은 처음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주왕산 금은광이를 넘어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월외마을을 지나는데 화마에 집을 잃은 분들을 위한 컨테이너 주택이 아예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나중에 다른 지역을 걸으면서도 이런 컨테이너 주택을 여러 번 보았는데 어떤 분은 아예 불에 탄 집터에 컨테이너 주택을 앉혀 놓기도 했다. 또 다른 분은 집을 새로 지었는데 마당에 예전에 사용하던 살림을 그대로 쌓아 놓았다. 동네분의 말에 의하면 집을 완공할 무렵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믿기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홍수에 무너지고, 화마에 쓰러지는 게 인간이다. 생태계의 맨 꼭대기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게 인간이라고 하지만, 해마다 우리는 자연 앞에서 힘을 잃는다.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바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결코 인간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과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지구 구성원의 하나일 뿐이다.
청송읍 소헌공원에 들어서면서 돌아본 외씨버선길 1구간.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주왕산·달기약수탕길. 화마에 덮인 숲길과 마을. 통째로 지나온 모든 것들을 빼앗긴 사람들. 그들의 한숨.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마음이 아프다. 더 여린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1길 주왕산 달기약수길 걷기를 위한 TIP
청송 소헌공원 아래 현비암강수욕장 주차장에 주차하고, 소헌공원 주왕산 약국 옆 정류장에서 주왕산행 버스를 타고 주왕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에서 하차하여 걷기 시작하면 됩니다. 주왕산행 버스는 3~4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청송군내 버스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