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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01. 나를 잃어버리는 14박 15일

by 힘날세상


길은 좁고 깊은 산골짜기를 따라 이어졌다. 우리는 아무 말없이 걸었고, 우리의 걸음은 무거웠고, 또한 가벼웠다. 골짜기를 따라 바람이 불었으며, 그 바람을 따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그랬다. 이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산이 가로막아 겨우 손바닥만 하게 하늘이 열려 있었지만 그들은 옹색하지 않았다. 좁은 골짜기에 겨우 겨우 집 한 채 들여 앉혔지만, 필요한 넓이만큼 마당을 만들어 햇볕을 받아들였다. 그 햇볕 아래에서 해바라기를 하며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쪼그려 앉아 들깨를 털었다. 미처 마당에 들여놓지 못한 농기구들은 울타리에 기대어 가을을 맞고 있었다.


외씨버선길은 경상북도 청송, 영양, 봉화와 강원도 영월을 잇는 248km의 산길, 마을길, 강변길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청정지역인 4개군이 뜻을 모아 만든 4색의 길을 연결해 보면 버선 모양이어서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라는 시구詩句에서 받아온 이름이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외씨버선길. 그러나 한 구간을 걷는 거리가 길고, 교통이 불편하여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전국의 산을 싸돌아다니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마음에는 늘 그 외딴 길이 담겨 있었다. 철을 잊은 빗줄기와 함께 고희古稀 가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때, 느닷없이 그 외로운 길이 마음을 휘감아 왔다. 말하자면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싸여버린 것이다.


보고 싶었다. 느끼고 싶었다. 손바닥만 한 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좁고 외롭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어떤 삶을 엮어내고 있는지 걸어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서둘러 배낭을 패킹했다. 그리고 무작정 떠났다. 14박 15일 동안 나를 잃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청송으로 가는 길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고속도로는 그렇게 저속도로가 되어 있었고, 나만 홀로 애가 타고 있었다. 주왕산 금은광이를 넘어서면 사람들이 삶의 터를 이루고 있을 테다. 영양 대티골에는 어떤 세상이 이루어져 있을까. 사람들마저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골짜기나 산마루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가슴에서는 어떤 것들이 덜컹거릴까. 마음만 급해지고 있었다.


40년 넘게 산길을 걸었다. 설악이나 지리산 같은 산등성이를 걸을 때마다 나는 오롯이 꽁꽁 처매어 놓은 나의 내면만 들여다보며 걸었다. 뺨을 때리는 바람에 맞서야 하고, 외줄기로 이어지는 고독한 길을 걸어야 했다. 발걸음은 자꾸 내 안으로 이어졌다. 오대산, 덕유산, 북한산 같은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산에서는 능선이든 골짜기든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그냥 산을 걷는 사람일 뿐이다.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낮은 산을 걷고 있다. 사람들의 세상과 가까운, 그래서 사람들의 발자국이 등성이와 골짜기에 무수하게 박혀 있는, 언제든지 그들의 세상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거미줄 같이 뻗어 있는 낮은 산. 산 밖 사람들의 삶의 소리가 발밑까지 다가오고, 그들의 이야기가 가슴으로 파고드는 낮은 산에서는 나의 걸음은 죄다 그들에게로 향한다. 산을 걷기도 하지만, 실은 사람 사는 세상을 걷는 것이다.


낮은 산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이 사람들 가까이 걷는 길이라면, 외씨버선길은 사람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래서 몸을 들려 조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그 길은 사람이 넘나들던 길이다. 보부상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넘어갔고, 마을 사람들이 장에 내다 팔기 위한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걸어갔으며, 전쟁통에 난리를 피해 어린아이 손을 잡고 숨죽이며 숨어들었던 길이다. 어떤 형태로든 사람 내음이 나는 사람의 길이다.


사람의 걸음으로 걸어야 하고, 그렇게 걸어가는 외씨버선길에서는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홀로 걸어도, 둘이 걸어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도란도란 남겨 놓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양심장독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마시면서 물병에 담긴 삶을 들여다봐야 하고, 바람에 흔들리며 길을 이끌어주는 리본을 따라가며 길을 이어주는 많은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끌어안아야 한다. 하물며 마을길을 걸을 때에는 그들이 쌓아놓은 세월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삶의 한 가닥을 이어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나를, 나의 에고ego를 잃어버리는 시간.


알록달록 익어가는 가을의 시간을 따라 걸으면서 내 마음도 익어가기를 바란다. 아직 겨울 추위가 오기 전에 내 마음이 얼어붙지 않도록 마음을 곧바로 세우고 걸어야겠다. 깊은 산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삶의 이야기들을 가닥가닥 건져 올리며 촉촉한 걸음을 걷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가슴이 설렌다.




20251119_162908.jpg 외씨버선길 248km

외씨버선길 248km

청송구간

1길 주왕산 달기약수탕길 18.9km (6~8시간, 상]

2길 슬로시티길 11.5km (3~5시간, 하]

3길 김주영 객주길 16.6km (5~7 시간, 상]


영양구간

4길 장계향 디미방길 18.8 km (6~8시간, 상]

5길 오일도 시인의 길 11.2km (3~5시간, 중]

6길 조지훈 문학길 13.5km (4~6시간, 중]

7길 최시형 동학길 18.3km (6~9 시간, 상]

8길 치유의 길 9km [2~4시간, 하]


봉화구간

9길 산타 하늘길 23.4km (7~9시간, 상]

10길 보부상길 19.5km [6~8시간, 중]

11길 춘양목 솔향기길 20.1km (6~8시간, 중]

12길 약수탕길 14.2km (5~7 시간, 중]


영월구간

13길 마루금길 16,6km (9~12시간, 최상]

14길 김삿갓 문학길 12.7km (3~5시간, 하]

15길 관풍헌 가는 길 24.6km (8~10시간, 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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