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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길 슬로시티길

03 강물이 말하고 있는 것은

by 힘날세상

문득 새벽녘에 잠이 깰 때마다 거실에는 묽은 어둠이 질펀하게 흩어져 있었다. 창문을 넘어오던 여명의 기운이 커튼에 부딪혀 부서진 빛줄기는 기괴한 형상으로 널브러져 있었고, 그럴 때마다 휘휘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러지고 무너진 빛의 형체. 그 섬뜩한 가슴 저림 앞에서 새벽이 물러나는 것을 보았었다. 섬뜩한 가슴 저림의 실체가 무엇일까. 노년의 삶에 스멀스멀 스며드는 어둠의 그림자일까. 늙을수록 어둠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 노년의 삶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강물처럼 살아가는 것.


슬로시티길은 청송을 끌어안고 흐르는 용전천을 따라 이어진다. 소헌공원에서 천변으로 내려서면 강 건너에 현비암이 마중 나온다. 새벽에 피어나는 짙은 물안개에 싸인 현비암의 수직 절벽은 어디서 신선이라도 나타날 듯한 분위기로 서 있었다. 아직은 낯선 지역 청송.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 빠르고 날카로운 억양을 보이고 있는 말소리는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나그네에게는 어딘지 설익은 느낌이다. 이것을 여행의 참맛이라고 말해도 되긴 할 것이다. 이 낯섦에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기는 하니까.


하얗게 피어나는 물안개처럼

당신은 내 가슴속에 살며시 피어났죠

조용히 밀려드는 물안개처럼

우리의 속삭임도 그러했는데


어떤 여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새벽. 슬로시티길은 강물을 따라 이어졌다. 새벽녘 물안개처럼 속삭이고 있었고, 그 속삭임 그대로 내 마음에 담겨왔다. 강물을 따라 걷는 길에는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속삭임이 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강물이 말하고 있는 그 무엇. 내 걸음에 따라 달라지는 강물의 색채. 아름답다기보다는 끈질기게 이어지는 생명력.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겠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세찬 물결 일으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닫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을 풀어 뒤틀어진 걸음 멈추고 갈대숲 죄다 불러들여 배고픈 겨울 새떼를 기다리기도 하는 강물을 따라 걷고 또 걸으며 내 마음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 강물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 새벽 무엇인가.



고희古稀에 접어들면서 세상이 뚝뚝 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단절의 느낌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로움으로 연결되었다. 사실 혼자서도 절대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또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혼자 있는 것은 절대 외로움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 흘러가야 하는 것들이 그렇지 못할 때가 가장 두려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내 마음이, 내 생각이, 내 걸음이 흐르지 못할 때마다 문득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감을 모두 빼앗아 갔고, 흐트러진 한숨만 몰아왔다.


덕천 1교를 건너 덕천민속마을로 들어갔다. 송소고택의 문턱을 넘으며 뜬금없이 정읍의 김명관 고택의 사랑채대청마루를 떠올렸다. 여행 버릇이다. 태백의 검룡소(한강의 발원지) 앞에서 진안 천상데미 아래의 데미샘(섬진강의 발원지)을 생각하고, 월악산 영봉에 오르면서 사천 와룡산 새섬봉의 암릉을 끌어온다. 좋게 말하면 연관 짓기이고, 험하게 말하면 갈피를 놓치는 것이다.

마을이 참 정갈하다. 걸음이 바쁘고 보니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고택이 다 똑같다는 궤변이나 흩뿌리면서 건성건성 돌아다닌다. 머릿속에 담겨 있는 여러 고택의 이미지와 옹색했던 시골집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막 가져다 붙여보다가 고택을 나온다. 참 알량한 여행이다.


증평교를 건너면 중평 솔밭이다. 농구장 두어 개를 이어놓은 정도의 소나무밭이다. 기계 소리를 요란하게 퍼뜨리며 무엇인가 공사를 하고 있다. 다가가 보니 작은 무대를 만들고 있다. 여름이면 제법 사람들이 모여 밤시간을 즐기는데 제대로 된 판을 깔아놓으려고 한다고 한다. 판을 깔아 놓는다는 말에 신명 나는 장단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판'이라는 말이 귀에 남았다. '일이 벌어진 자리'라는 말보다는 '처지, 형편'같은 말들이 먼저 쏟아져 나왔다. 좋은 말인데 안 좋은 느낌으로 쓰이는 듯해서 안타깝다. 달빛이 휘영청 내려앉는 여름밤에 이곳에서 그야말로 사람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판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걸음도 신명 나는 놀이판처럼 흐드러지게 막힘없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음이 부대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삶은 되는 대로 살고, 하루하루는 제대로 즐기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매일매일 맞아야 하는 시간의 순간순간을 몰입하여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걸어야 하는 길도 걸음걸음마다 구름에 달 가듯이 흥얼거리며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강물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용전천이라고 불러야 되는지, 지금쯤은 낙동강이라고 슬쩍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징검다리를 만났다. 용전천은 이제 용전천이라는 이름을 버리려고 하나보다. 임하댐으로 흘러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한참을 더 달려야 하는데도 빨리 강江이 되고 싶은가 보다. 빠른 걸음으로 흐르는 것도 부족해서 흐르는 물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아 수위水位를 높여 나그네가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를 날름 삼켜 버렸다.


살다 보면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건너야 할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버리기도 한다.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음訃音을 듣기도 한다. 오랫동안 밤을 새워 내 딴에는 영혼까지 불어넣어 응모했던 글이 공모전에서 낙방하는 일이 일어난다. 내 보폭대로 걸을 수 없는 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픔이고 가슴 저림이다.


물에 잠겨 버린 징검다리 앞에 앉아 있다가 강물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 그냥 돌아 가.' 수량이 많고 그래서 물살이 셀 때는 모든 건 물의 세상이다. 징검다리쯤이야 휘뚜루마뚜루 휩쓸어 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힘이 약해지면 징검다리 사이로 몸을 비벼 겨우겨우 빠져나간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눠 양쪽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거대한 절벽을 마주치면 미련 없이 돌아간다. 거칠게 몰아치다가도 어느 순간 눈만 껌벅이며 조용하게 흐르기도 한다. 제가 가지고 있는 깊이는 말없이 감추고 소리도 없이 흘러간다. 그것이 강물이 흘러가는 방법이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나이가 들면, 아니 나이가 들지 않았다고 해도 강물같이 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 말없이 조용히 멈춰 있어도 제 품으로 많은 물고기를 기르는 넉넉함이 있고, 그 넉넉함으로 바다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다시 중평교로 돌아간다. 돌아가며 보니 그냥 지나쳐 왔던 것들이 많다. 길가에서 발돋움하고 있는 들꽃의 노래, 논바닥에 나 있는 트랙터 바퀴 자국에 담겨 있는 농민들의 이야기, 나지막한 산자락을 따라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 중평마을의 평온함까지 새록새록 쌓여왔다. 여기저기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는 즐거움에 느린 걸음으로 걸었고, 그만큼 행복했다. 강물이 말하고 있는 것을 거두어들이며.


2길 슬로시티길 걷기를 위한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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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길 산소카페 청송정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주차장 옆 정류장에서 진보에서 출발하는 청송행 버스를 타고 소헌공원에서 내리면 된다. 2길 종점인 신기리 느티나무에서 청송정원까지는 약 700 미터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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