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설 때쯤, 바람이라도 나뭇가지를 흔들 정도로 부는 날이면, 힘에 부쳐 걸음마저 무겁게 디뎠던 날이면 아이들 방문을 열다가 이유도 없이 슬퍼진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허전함에 짓눌리게 된다. 밤에, 하루가 문을 닫는 밤에.
책 보퉁이 어깨에 둘러메고 늘 주린 배 움켜잡고 돌아오던 하굣길. 지치고 힘이 빠진 우리를 동네 어귀에서 무표정하게 맞이하는 포플러나무가 있었다. 하늘로만 솟아오르던 포플러나무는 누구를 위한 그리움이었을까, 나는 그 나무를 ‘멀대나무’라고 불렀다.
멀대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어른들이 키 큰 사람을 멀대같다고 하는 것을 흉내 낸 것이다. 그때 나는 그 멀대나무가 하늘까지 닿을 거라고 믿었다. 그 멀대나무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나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멀대나무에 기대어 마음속을 맴돌고 있던 소녀를 그리워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그 소녀를.
삶의 뒷부분에 서 있는 지금, 도둑처럼 그 ‘멀대나무’에 기대어 서보지만 나는 ‘멀대나무’ 아래에서 조금도 그리움을 일으키지 못했다. 늙어버린 하나의 포플러나무에 기대어 섰을 뿐이다.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던 소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세월과 함께 낡아버렸다. ‘멀대나무’가 아닌 포플러나무 아래서 나를 흔들고 있는 허전함의 실체는 세월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날갯짓으로 서울로 날아가고 난 후, 두 아이의 방을 하나로 합하면서 아이들의 물질적인 흔적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아이들 방문을 열었을 때, 먼저 들어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내를 보았을 때, 나는, 우리는 그때, 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는 허전함의 실체를 보았었다.
그때부터였다. 세월은,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난 후의 세월은 견뎌내기 어려운 무게로 쌓여갔다. 그것은 이 세상에 부모 된 모든 사람은 다 견뎌내야 하는 황홀한 아픔이다. 내가 울고 있는 만큼, 틀림없이 그 이상으로 어머니가 30년 전에 더 아파했을 것이고, 아버지가 더 속울음을 울었을 것이다. 그 허전하고 가슴 저림은 아이들을 내보낸 부모의 가슴마다 찾아드는 몹쓸 병이다.
산을 떠돌아다니며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높은 산, 깊은 산, 멀리 있는 산, 가파르게 올라야 하는 산. 가리지 않고 올랐다. 그야말로 스스로 나를 산에 파묻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것이라고 소리치며 산길을 걸었다. 쓸쓸하게, 외롭게. 하루에 두 개씩, 세 개씩 산꼭대기에 오르기도 하였고, 골짜기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며 주저앉았다. 아버지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은 건강을 생각해서 무리하지 마시라고 쪼아댔다. 그렇게 울음이 범벅이 된 걸음으로 견뎌내려고 하였다. 쓸쓸하고 외로운 걸음으로.
산꼭대기에 앉아 가을 하늘빛으로 데워진 햇살을 등으로 받아들이다가 울어버린 날,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고운동계곡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최치원 선생이 골짜기를 거슬러 나올 리 없겠지만 사람들은 골짜기에다 석별의 정을 쌓는다.
자식들은 당연한 걸음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들의 방을 떠나갔다. 들고 다니던 지팡이 하나를 골짜기 입구에 꽂아 놓고 지리산이 되었다는 고운 선생과 달리, 아이들은 제 몸의 부스러기들을 수북이 흩어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그것들로 인해서 부모들이 허리 굽혀 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자식들은 저 넓은 하늘을 제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리라. 제 목소리로 노래하리라. 부모들의 허탈함 위에 또 한 켜의 노파심을 쌓아 올리리라.
산은, 가을 산은 참 무섭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은 여럿이서 걸어도 떨쳐내지 못한다. 지리산 둘레길 위태 마을에서 만난 할아버지. 닳아버린 지팡이를 동무 삼아 자신의 얼굴만큼 주름이 잡힌 담벼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여든세 살의 노인네 앞에 수북이 쌓인 그리움, 또는 외로움을 보았다. 말라비틀어진 손바닥을 보았다.
“자식들이 보고 잡어…….”
늦은 밤이던가, 바람이 불던 날이던가 아들방에 앉아 있었다. 그놈의 허전함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책꽂이를 바라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책을 보았다. ‘중학교 국어 2-2‘. 아들이 공부하던 책이다. 책표지에 쓰여 있는 ’국어‘라는 글자는 어김없이 ’굶어‘로 바꿔 놓았다. 세상의 국어책마다 사람을 만나면 제 이름을 잃어버린다. 나도 그랬는데 아들도 그랬다. 손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책을 넘겨보니 수업시간에 공부한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도 공부시간에 딴짓하지 않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던 모양이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라는 시도 있다. ‘그 붉은 산수유 열매’라는 시구에 밑줄을 긋고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붉은색으로 주석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시의 끝부분의 여백에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써 놓았다. 삐뚤빼뚤 써놓은 아들의 글씨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해 겨울 방학 때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는 아들에게 매를 들었다. 책을 다 내다 버리고, 학교를 그만두라고 큰소리쳤다.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한 시를 배우면서 제 딴에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적어 놓은 그 갸륵한 아들을 몰아붙였으니. 그것도 죽기 살기로 무섭게 눈을 부라렸으니. ‘잘못했어요. 아빠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할게요.’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뚝뚝 흘리는 눈물 위에 겨우겨우 올려놓던 아이는 그때, ‘성탄제’를 배우던 수업시간을 혹시 떠올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부모들은 새벽마다 잠이 깨어 텅 빈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집안에 가득 차 있는 외로움을 보아야 한다. 외로움을 걷어내 보겠다고 자식들의 빈방에 들어갔다가 봇물처럼 눈물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부모라면 반드시 지녀야 하는 시간이다. 허전하다고, 쓸쓸하다고 고개를 떨구고 늘키기만 할 정도로 굴터분한 일은 아니다. 부모가 혼자 있는 그 만큼 ,자식들의 날갯짓은 더 크고,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것이니까. 부모는 그 날갯짓을 몸으로 다 받아낼 알심이 있는 것이니까.
가을은 어디선가 파란 하늘을 짓고 있을 것이다. 간들바람도 한 꾸러미 섞어 넣을 것이다. 말갛고 눈 시린 시간들을 흩어 뿌려 온 세상을 그리움으로 담뿍담뿍 채워 놓을 것이다. 그때, 언뜻언뜻 다가오는 가을의 걸음을 보았을 그때, 때로는 부모가 아니고 싶기도 할까. 그 지긋지긋한 숙명의 굴레를 한 번쯤은 벗어버리고 싶기도 할까. 그래서 문득 슬픈 노래일망정 가을의 노래를 듣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