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힘날세상 Aug 15. 2023

3화 무인도,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은퇴했어도 끝이 아니니까

“형, 내가 말이야. 나는 끝났어. 응. 다 끝났다고.”

“야 인마, 네가 끝났으면 나는? 나는 죽었겠다?”

등산복을 입은 두 사람이 소주잔을 놓고 마주 앉아 있다. 산에 다녀온 피로를 술 한 잔 나누며 풀고 있으려니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나를 끌어당긴다. 국밥이나 한 그릇 먹고 나가려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의 점입가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형, 나 35년 동안 일했거든. 뼈 빠지게 벌었다고. 후. 형, 술 한잔 따라봐.”

“너 취했다. 그만 먹고 가자.”

형이라고 불린 노란 등산복이 눈이 풀린 사내의 검은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이 씨. 놔. 형까지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나 아직 안 취했다고. 형, 한잔만 더 먹자. 내가 실업자가 됐거든. 별 볼 일 없는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니까. 벌써 한 달도 넘었다고.”

검은 등산복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노란 등산복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 너만 실업자냐? 나는 벌써 2년째다. 2년째라고.”

“형은 그래도 사위가 차도 사줬잖아. 전원주택…… 별장도 있잖아.”

검은 등산복은 울음을 터뜨렸다.

“씨팔, 형, 내가 뭘 잘못했어. 정년퇴직? 나 아직 더 할 수 있거든. 회사에서 쫓겨나고, 집에서도 찬밥이냐고. 내가 번 돈 내가 쓴 줄 알아? 흐흐흐, 자식들이 다 가져갔어. 나만 X됐단 말이야. 재미가 없어. 사는 재미가 없다고.”

검은 등산복은 탁자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바람에 소주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노란 등산복은 뒷감당하느라 어쩔 줄을 모른다. 깨진 술잔을 치우라, 눈꼬리가 올라간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굽실거리랴. 화가 날 법도 한데 노란 등산복은 검은 등산복에게 큰 빚이라도 진 것처럼 그의 주사를 다 받아내고 있다.      


퇴직한 가장의 넋두리라고 밀어내기에는 검은 등산복의 울음이 깊이가 있었다. 더는 안 봐도 훤하다. 평생을 가족들을 위해 일하다가 퇴직한 가장의 쓰라린 읍소가 아닌가.      


37년 동안 교단에 섰다. 교사로서 내가 만난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훌륭한 교사는 못 되었을지라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다. 그 교단을 내려서는데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속으로 흐른다는 것을 그날 퇴임식장에서 처음 알았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3년이나 후배인 교장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동료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퇴직한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떤 선배는 퇴직했다는 사실을 잊고 타이를 매고 출근하려 하다가 허탈하게 웃었다고 하고, 어떤 선생님은 출근하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러 일어나지 않은 척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실 은퇴는 거대한 압박이다. 정년퇴직하시는 선배들에게 늘 했던 말은 ‘부럽습니다.’였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선배들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다는 게 자신이 없기도 했다.     

 

박봉이었어도 짠지 주머니를 몇 개씩 차고 살았던 아내 덕에 비를 가릴 집이 있고, 매달 부은 연금으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나를 짓누르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을 내려놓은 정신적 상실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퇴직 후 아무렇지 않게 잔잔했던 마음은 석 달을 넘기면서 울퉁불퉁해지기 시작했다. 허탈감이었다. 무엇인가 애지중지하던 것을 잃어버린 꼭 그런 느낌이 예리한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이거 놔. 나 이제부터 막살아버릴 거야. 나도 좋은 옷 사 입고, 맛난 거 먹으며 여기저기 놀러 다닐 거야. 형, 거짓말 아냐. 내가 못 할 거 같아. 왜 이래. 나도 좀 사람답게 살아보겠다 이거야.”

검은 등산복은 노란 등산복의 어깨에 매달려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국밥집 문턱을 넘었다. 그의 뒷모습이 나를 보는 것처럼 눈에 익었다.      


안다. 검은 등산복의 검은 속을 충분히 안다. 내일 아침 술에서 깨어나면 배낭에 김밥 한 줄 넣고 말없이 산등성이를 걸을 것이다. 눈에 어리는 처자식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게 은퇴했든 안 했든 일반적인 아버지니까.     


핸드폰처럼 터치가 되는 노트북을 하나 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복장으로 차려입고 ‘One Note’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수능 기출문제 해설 강의를 했다. 유튜브에 올렸다. 당연히 조회 수가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치는 것밖에 없었다. 피에로가 공연장에서 줄을 타야 신나는 것처럼 선생은 분필을 들어야 힘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달랬다.     


느닷없이 쳐들어온 코로나에 일격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랬을 것이지만, 산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산의 품에 안겨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그려 보았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면서 다다른 결론은 ‘혼자 놀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혼자 논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은퇴했고, 가진 것이 없고, 나의 지경地境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힘을 잃어갈 것이다. 주변의 친구들도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다리의 힘이 더 빠지기 전에, 생각이 흐려지기 전에 혼자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혼자 노는 것은 꼭 외로운 것은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 무서운 것이지, 내가 스스로 혼자가 되었을 때는 외롭지 않은 것이다. 홀가분하고 편안한 것이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활개 치며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소파에서 책을 읽고 독수리 타법이라도 자판을 두드려 일기라도 써보는 일. 그런 곳은 바로 내 집이다. 말하자면 내 집은 스트레스 없이 마음 상하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무인도인 것이다. 은퇴는 찌든 세상에서 벗어나 신세계가 펼쳐져 있는 무인도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한한 자유가 넘쳐나는. 무인도.      


무인도. 나 혼자 탐험해야 하는 흥미진진한 무인도가 지금, 내 앞에 날것 그대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내가 걷는 걸음이 조금 비틀거리면 어떨 것이고, 하루에 열 걸음만 걸어도 괜찮은 거다. 나무 그늘에서 나무늘보가 되어도 좋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밤새 속삭여도 좋으리라.      


무인도.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2화 우리는 부모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