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고 부서져야 하는
“엄마가 뭐 안다고 그랫!”
“그럼 엄마가 딸한테 그런 말도 못하냐?”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천변으로 나갔다. 늘 같이 다니던 아내는 피곤하다며 TV 앞에 앉았고, 나만 혼자서 나섰다. 철교 아래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달렸다고 몸이 조금 가볍다. 6분 페이스로 달리고 걷는 것을 반복하며 공원 입구에 도착하여 헐떡이는 들숨 날숨을 다독인다.
느릿하게 흐르는 하천이 흘려내는 노래는 그대로 내 마음이다. 결혼한 딸아이를 두고는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으로 흐르다가, 30대 중반이 지나도록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아들 앞에서는 무거운 헤비메탈을 노래하고 있다.
10여 년 넘게 빠져 있었던 마라톤을 그만두고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마라톤 세포는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내년 3월 동아 마라톤에서 가족 이어달리기를 해보겠다는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풀코스나 하프코스를 혼자서 완주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아내와 내가 10km씩 나누어 달리고, 나머지는 아들이 달리는 이어달리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10km는 달릴 힘을 기르고 있는데, 그때까지 아들과 같이 달려줄 사람을 아들이 데려오기는 할까?
머릿속은 온통 아들을 결혼시키는 일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고 채근이라도 할라치면 제 딴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어느 날 넙죽 인사를 시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아들은 내 입을 막았다. 안다. 내가 설레발을 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부모의 관점에서 어디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말이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그럴듯한 처자를 마주 앉혀 보았지만, 늙은이들의 판단과 젊은이들의 시각은 쉽게 합해지지 않았다. 아들이 좋으면 처자가 싫다고 하고, 처자가 반색하면 아들이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머릿속을 다 털어버리고, 다시 천변을 달려 집으로 돌아온다. 운동화를 벗은 지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풀코스를 20여 번 뛰었던 몸이 기억하는지 숨이 고르고 걸음은 가볍다. 빠르지는 않았어도 쉬지 않고 달려 철교 아래를 지날 때, 자전거가 달려오는 바람에 달리기를 멈추었고, 그 바람에 앞에서 걷고 있는 두 모녀를 따라 걷게 되었다.
“그래 엄마가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말한 것이 그렇게 못마땅해?”
“내가 알아서 한다고. 엄마, 제발 그 얘기 좀 하지 마.”
앞에서 두 모녀가 나란히 걸으며 나누는 말이다.
아들 녀석 생각이 났다. 저것은 아들과 나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래, 엄마가 미안하다.”
“몰라.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엄마가 왜 간섭하냐고.”
그리고는 딸은 걸음을 빨리 걸어 휭하니 앞서간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해.”
앞서가던 딸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는
“나 이제부터 나가 살 거야.”
하더니 옆길로 빠져 도로로 올라가 버린다. 뒤따르던 엄마는 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그냥 천변 둔치 길을 따라 걷는다.
‘저 아주머니가 바로 나로구나. 저분과 술잔을 마주놓고 앉으면 책 몇 권은 쓰겠구나.’
그리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지나가려는데 그 아주머니가 울먹이고 있다. 외롭고, 서럽고, 허퉁하고, 안타까워 보였다.
“딸년들 다 필요 없어.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주머니 이게 다 부모 된 죄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인 것을,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실컷 울고 들어가십시오. 그래도 엄마들은 속 시원하게 울기라도 하잖아요. 아빠들은 괜히 허공이나 휘저을 뿐입니다. 울어서 누가 달래나 주겠으며, 발을 굴러 이 아픔을 어디에 하소연인들 하겠습니까? 그저 가슴이나 쥐어뜯을 뿐입니다. ’
오목가슴이 저려 비틀걸음을 걷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나에게 투영됐다. 부모는 전생에 자식에게 큰 빚을 진 관계였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평생을 자식에게 매어 사는 것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억지스럽긴 해도 어찌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들을 믿는다. 풀코스 이어달리기를 못하더라도, 내가 마주 앉혀주는 처자들과 인연이 닿지 않는다고 해도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닌가. 열심히 살아가는 착한 아들이기에 내가 받아주어야 한다. 오늘도 한강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곁을 달리는 분이라도 만나면, 나란히 달리다가 눈을 마주치고, 같이 밥도 먹고, 같이 웃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며, 나무 밑에 앉기도 하다가, 같이 사는 세상도 그려보는 사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뿐인 그 아주머니도 집으로 돌아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모질게 뿌리치고 달아나버렸지만,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바늘 하나 꼽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어질러 놓은 딸의 방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쓸고 닦을 것이다. 행여 늦게 들어오는 날은 불을 밝히고 졸리는 눈 비벼가며 애타는 마음으로 현관문만 바라볼 것이다. 또다시 툴툴거리면서 쏘아붙여도 ‘아이고, 이쁜 우리 딸’ 하며 토닥토닥 다 받아줄 것이다. 예쁜 옷을 보면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 사서 입히고 싶어 할 것이고, 늘 좋은 생각만 하며 살기를 바랄 것이다. 지나가는 멋진 총각들을 흘깃흘깃 훔쳐보며 그 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딸내미 옆에 세워 볼 것이다.
‘아주머니, 우리는 우리 앞에서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저 아이들을 낳은 부모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자식들 앞에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고 부서져야 하는 부모인 것을. 그렇게 기다려 보자고요.’
등허리에 땀이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