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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Aug 13. 2023

1화  황혼은 아름답다

붉은빛이 짙어진다. 이미 수면을 붉게 물들인 노을은 뾰족하고 날카로운 바람을 밀어내고, 해변에 늘어선 사람들을 물들인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환호성을 쏟아낸다. 환하게 웃는 얼굴 위에서 지나온 시간이 붉게 물든다. 붉은 세상이다.

 


붉게 물든 얼굴 안쪽으로 그늘이 보인다. 느닷없이 창궐한 코로나 19의 뭇매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은 치솟고 있는 물가의 펀치를 맞고 휘청거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금리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결정적 한 방이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 붉게 물들고 있다. 무서운 세상을 힘들게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그냥,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잊고 싶어서 환호성을 지른다. 더 큰 몸짓으로 일어서겠다고 웃어 보인다. 발악이다. 저항이다. 한 해가 넘어가고 있다.

 


대만 타이중臺中의 시골 마을을 걸었다. 가오메이습지高美濕地가 멀리 바라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황혼 무렵이었고, 오래 걸었던 터라 지쳐 있었다. 길가에 작은 집이 있었다. ‘커피咖啡’라고 쓰여 있는 작은 팻말이 작은 문 앞에 걸려 있었다. 빨려 들어가듯이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참 좁고 좁은 실내는 침침하기까지 했다. 2인용 원탁 2개가 각각 작은 창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고, 긴 탁자 하나가 의자 여섯 개를 더불고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안쪽 벽에는 낡은 피아노가 낡은 시간들을 가득 쌓아놓고 있었다. 닦지도 않은 듯 먼지도 내려앉아 있었다. 그 비좁고 허름한 뜸막같은 그곳은 강한 흡인력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창가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손때가 묻은 작은 노트가 있었다. 무심코 넘겨봤다. 페이지마다 사진이 붙어 있고, 손글씨로 짧은 글을 적어 놓았다. 여러 나라 말로 쓰여 있었는데, 한글로 쓴 페이지도 있었다. 이 집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느낌을 적어 놓은 것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 참 여유 있고,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중국어로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과 어쩌다가 들리는 照片(사진), 感觉(느낌), 写(쓰다) 등의 단어로 미루어보아 노인이 하려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좋아요.好!’하며 노트를 들어 보였다.



작은 창을 넘어 붉은 노을이 밀려들었다. 두 개의 창을 통해 들어온 붉은빛은 좁은 카페를 채우고도 남았다. 노을빛은 가운데에 있는 장방형 탁자를 넘어 낡은 피아노마저 붉은빛으로 감싸 안았다. 실내는 온통 붉은빛이었다. 맑은 피아노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노인이었다. 붉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두꺼운 손가락은 붉은빛이었다. 붉은빛은 팔을, 어깨를,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노인은 그대로 붉은빛이었다.



낮으면서도 청아한 가락이 흘러나왔다. 느릿했지만 무게가 있었다. 가라앉은듯했지만, 생동감이 있었다. 노인이 흘려내는 멜로디는 거분거분한 몸짓으로 카페를 돌아다녔다. 구부정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는 노인은 영락없는 등신불等身佛이었다. 아름다웠다. 창밖으로 붉은 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황혼黃昏은 낮과 밤이 교차하는 무렵을 나타내는 단어로, ‘끝 무렵’을 빗대서 표현하는 말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말이다. 그래서 '황혼'은 인생의 말년을 비유하는 말로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프랑스에서는 황혼을 ‘개와 늑대의 시간 L'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고 한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에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고 있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황혼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내가 기르고 있는 개와 더불어 즐겁게 보낼 수도 있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늑대에게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내가 주관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이 부딪혀야 하는 피동적인 것이다.

 


노년의 삶이 이런 것일진대 아등바등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노년은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다리에 힘이 빠지는 시기에는 소파나 차지하고 뒹구는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움켜쥔 것부터 놓아야 한다.

 


황혼기를 걷고 있는 노인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작은 카페의 창을 열어 노을빛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자기 삶의 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창을 넘어 들어오는 붉은 황혼 위에 자신의 손끝으로 피워낸 피아노의 선율을 얹어 놓고 있는 노인. 작은 노트 위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어우러지려는 노인의 노쇠한 시간. 삶의 끝부분에 어떤 색을 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노인의 감성. 아름다웠다.



움켜쥔 손을 펼치고, 가진 것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활짝 열린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힘들게 살아왔어도 황혼 녘에 나에게 다가오는 실루엣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일지라도, 내가 길러온 개인 것처럼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삶의 끝을 볼 수 없다. 오직 남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남에게 보이는 그때, 아름다운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꽁꽁 싸매두었던 마음을 열고, 움켜쥐고 있던 손도 활짝 펼쳐서 가진 것을 다 내놓아야 한다.

 


섣달 그믐날의 해를 보내는 사람들은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올해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있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오르고 싶은 마음. 그것은 욕망이다. 그래서 저들은 떨어지는 해를 오직 내 것으로 담아두고만 싶은 것이다. 붉은 노을 뒤에 담겨 있는 깊이는 관심이 없고, 지금 들이댄 사진기에 그럴듯한 사진이 담기기만 바라고 있다. 오직 나를 위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황혼을 받아 자신의 피아노 소리를 담아 남과 나누어 가지려는 노인의 마음은 아닌 것이다.

 


나는 붉은빛에 휩싸여 노트를 들었다. 노인의 카메라에 담긴 내 사진이 붙을 곳을 남겨두고 연필을 들어 마음을 얹었다.

 


“오늘, 참 아름다운 황혼을 만났습니다. 노인께서 일으켜 세우신 피아노의 선율은 황혼의 붉은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김현승 시인이 <절대 고독>이라는 시에서 말하는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만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우리가 마주칠 그날에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티끌처럼 날려 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갈 수도 없는 그 끝’에서 나를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혼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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