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건대 그땐 풍경에 취했다. 겹겹이 포개진 산의 실루엣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내 몸은 찬물로 샤워를 하듯이 풍경의 세례를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샤워가 거듭될수록 몸은 어떤 갈증을 느꼈다. 갈증의 정체는 모호했다. 충분히 아름다운 산을 애인으로 삼고 있는데도 그 속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붙박이 애인은 나를 배신할 리 없는데, 뭔가를 내게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이혜영, 『지리산 둘레길 걷기 여행』에서
세상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어딘가에 더 좋은, 더 유쾌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감추어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행의 DNA가 아닐까. 이 죽일 놈의 DNA에 홀려 캐리어를 싸고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여행이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한 발걸음이라면 굳이 비싼 돈 들여서 며칠씩 시간을 버려가면서 그 힘든 걸음을 걸어야 할까. 좋은 여행지는 TV에서 다 보여주고 있고, 인터넷에 널려 있는 사진으로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데도 꼭 그 비싸고 힘든 여로旅路에 들어서야 할까. 그런데도 떠나는 이유는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고 싶은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평면적이라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은 입체적이다. 사방, 팔방에서 휘몰아오는 짜릿하고, 그래서 강렬한, 날카로운 시공간이다. 밑그림이 조금도 그려지지 않은 텅 빈 도화지이다. 혼자 앉아 그리다가, 만나는 사람과 나누어 그려 넣는 그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랏빛 기대감으로 가방을 싼다.
공항에서 발권하고 탑승 절차를 밟는 중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헤미안Bohemian의 속성이 깊이깊이 가라앉은 여행의 세포를 갉작거리는 것은 꼭 방랑의 활시위만은 아니리라. 마음이 이끄는 발걸음은 어떤 형태든 질서는 있을 테니까.
좋았다.
길었고 또 길었던, 그래서 무너진 동굴같이 출구가 없을 것 같던 COVIC ㅡ19의 짓누름에서 벗어나던 날, 제일 먼저 깨어난 것은 여행의 세포였다. 그 뭐라더라. 혐기성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물, 또는 우리가 밟아야만하는 흙속에 산소가 다 사라져버린 그 상태. 숨을 잇기 어렵고 힘든, 그 뾰족한 짓눌림 속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았던 보헤미안의 DNA가 마냥 좋았다.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 솜사탕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여행의 세포가 좋았다. 그 속삭임이 좋았다.
여권의 한 페이지를 넘겨 본다. 무성의하게 찍혀 있는 입출국 확인 스탬프는 가뭄에 웅크리고 있던 이파리가 촉촉이 내리는 단비를 머금고 활짝 피어나듯이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통통거리며 튀어 나왔다. 지난 여행의 시간들은 어디에서든 살아 있었다. 여행의 길 앞에 부푼 마음으로 서 있는 많은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박차고 날아오르듯이 내가 걸었던 낯선 동네의 시간들은 또렷하게 날아올랐다. 힘차게 솟아났다.
호이안에 간다. 늙은이들 둘이서 며칠 뒹굴어보자고 자료 수집을 다 해놓고, 비행기 표를 사기 직전 코로나가 끼어들어 무산되고 말았다. 마음으로는 다 돌아다녔던 곳이다.
공항은 늘 어렴풋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여행의 끝에서 떨어져 남은 것, 이번 여행보다 앞서서 달려나간 것. 하여튼 그리움으로 터를 잡았다. 여행을 시작하고 마치는 끄트머리이기에 그 조각들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기에 어찌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리움은 늘 설렘이다. 마음이 두근거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공항은 또 하나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활짝 열린 문이다.
늦은 밤 비행기를 떠나보내려는 공항은 이래저래 바쁘다. 출국장에서 빠져나온 승객들은 모두 식당으로 달려간다. 그렇다. 먹어야 하는 것 맞다. 식도락도 훌륭한 여행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면 어쨌든 한 발 내딛는 것이고, 한 발 내디디면 긴장감 쪽에 서는 것이다. 그렇게 여행의 시작이 열린다.
좁은 좌석은 저가 항공이라고 해서 더 좁은 건 아니다. 영화를 쏟아내는 모니터가 없다고 비행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내식이 없는 비행은 오롯이 내 시간이다. 가방 속에 책을 한 권 넣어 왔지만 꺼내지 않았다.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상념들을 불러모아 오와 열을 맞춰 세운다. 글감으로 피어나기는 할까.
새벽녘까지 불을 밝히고 여객들을 맞이하는 공항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를 착륙시켜 보딩 브릿지를 연결하기까지 보이지 않게 뛰어다닌 사람들. 입국 절차, 수화물 운반 담당자들. 그리고 환전소, 유심 판매점에서 피곤을 감추고 웃어 보이는 사람들. 그들 앞을 지나 빠져나온 공항. 그리고 숨을 콱 막아오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 자동차들의 엔진 소리.
늦은 밤인지 한밤중인지 다낭 국제공항에 내렸다. 예약해놓은. 택시기사와 만나 호이안으로 간다. 스포티지 만큼 작은 기아 소렌토를 타고. 첫날의 여행 끝부분은 피곤함이 잠식한 낯섦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