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면

걸어서 만나는 시간이 있다

by 힘날세상



새벽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잠속으로 들어갔는데 통로의 끝에는 빛바랜 새벽이 서있었다. 호이안의 텃세였을까. 잠의 고요가 흩어진 것이다. 하루의 고단했던 시간들을 촘촘하게 막아서지 못했는지 나의 가녀린 잠은 조각조각 흩어져 어둠의 그물을 다 빠져나가버렸다. 그물코에 설핏설핏 묻어있던 잠의 껍질들을 탈탈 털어버리고 제 형체마저 잃어가며 할깃거리고 있는 어둠을 밀어 밖으로 나섰다.


낯선 새벽이 어깨를 펴고 있다. 나도 그 곁에서 어깨를 풀어본다. 팔을 돌려보고, 옆구리를 굽혀본다. 무릎도 꺾었다가, 발목까지 돌려본다. 그러니까 일정에도 없는 맨손체조를 해버린 것이다. 그때, 열대지방의 새벽은 제법 새뜻한 공기와 함께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시쳇말로 상쾌했다.





우리는 귀하게 여기는 화초인 극락조가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수영장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다. 수면은 아직도 곤한 잠에 빠져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명경지수라는 말을 생각했다가 얼른 지운다. 그 이름을 달아주기에는 덮여있는 세속의 켜가 너무 두꺼웠다.








수영장 뒤로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화원에서 값비싼 대접을 받는 꽃이 가지런히 서서 길을 잇고 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으나 눈에 익었다. 길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아무도 없는 길을 따라 가본다. 키가 큰 나무가 길끝에 서 있다. 진한 분홍꽃이 더덕더덕 달려있다. 시골 처녀 같은 청순함이라고 할까. 하이힐을 신고 몸에 달라붙는 스거트를 입은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들에게서 흔히 풍겨나는 진한 향내도 맡을 수 없었다. 속된말로 촌스러웠으나 은근히 눈길을 잡아 당겼다. 언제부턴가 진한 원색에 눈이 끌린다. 빨간색이 좋아지면 늙었다는데, 내가 늙은 게 분명하다. 어정쩡한 분홍보다는 새빨간 꽃이 좋고, 샛노랑이 채도가 낮은 노란색을 뛰어 넘게 보였다.


어느. 순간 해가 돋았다. 어둠이 빠져나간 자리마다 아침이 햇볕을 데리고 들어섰다. 뜨거웠다. 카페로 보이는 건물 앞에 아주 큰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큰 나무는 그만큼 넓은 그늘을 드리웠고, 그 넓은 그늘에 놓인 벤치에는 아침이 자리 잡았다. 벤치에 앉아 낯선 도시의 아침을 만난다. 후르르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이면 그런대로 어우러질 만하였다.







작은 도시의 아침은 오토바이를 따라 길가로 번져갔다. 나무 그늘에 앉아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의 시간 속으로 힘주어 달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아침은, 저들의 하루는 어떤 모양으로 열리고, 무엇을 담아 흡족한 매듭을 지을 것인가를 그려보았다. 아침 해가 몸을 일으킬수록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는 거대하고 빠른 물결을 이루었다. 저 물결을 따라 도시의 숨결이 이어질 것이고, 그 숨결 속에서 도시는 활력을 찾을 것이다. 삶의 바퀴는 그렇게 돌아갈 것이다.



늘 바쁘게 살았다. 이리저리 눈을 돌려야 할 곳이 많았고, 어느 순간이든 집중하지 않으면 큰 구멍이 뚫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몸을 내려놓을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리셋해서 누리는 평안은 어디에든 없었다. 그냥 쓰러져 잤고, 그렇게 하루의 문을 닫았다. 그나마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고, 그렇게 찜찜하게 세월은 흘렀다. 일을 놓고 나오는 날 동료들은 섭섭함인지 시원함인지 정의할 수 없었던, 그래서 좀 비틀거렸을 내 발걸음 위에 모양을 알 수 없는 박수를 얹어주었다. ‘축하한다’는 인사도 곁들였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느꼈던 그 정체 모를 마음은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오토바이 출근족들은 어쩌면 휴식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에 지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쉬고 싶은거는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나 일을 놓은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하고 싶다는. 나는 또 다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몸과 마음을 풀어 놓고 싶다. 코로나가 사람들의 세상을 바꿔버렸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고 늘어진 삶을 잇고 싶다. 그 한끝은 여행이다.






거대한 물결에서 빠져나온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옆에 멈추었다. 새빨간 아오자이를 입은 아주머니는 오토바이를 멈추기 전부터 웃음을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무어라고 말했다.

“*%^%^%$&*&^@#$$#$#^?”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 대답을 하지. 그녀보다 내가 더 답답했다. 그래도 무언가 답을 하긴 해야 했다.

'Xin chào 안녕하세요?', 'cảm ơn 고마워요'

내가 아는 베트남어는 오직 이 두 가지이다. 무엇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 인사부터 하자.

"Xin chào 안녕하세요?"

나의 갑작스러운 일격에 그녀는 여유있게 받아쳤다.

"Xin chào"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Để mình giúp cậu nha? 도와드릴까요?”그녀는 폰에 있는 번역기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내가 등지고 앉은 건물을 가리켰다. 늙으면 몸은 둔해지지만 눈치는 더 날카롭고 재빨라진다. 그녀는 내가 자기 가게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손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오토바이에서 내리기도 전에 웃어 보인 것이었다.





그녀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밤새 갇혀 있어 늘어질 대로 늘어진 더운 공기가 불쾌함을 확 밀어부쳤다. 그녀는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탁자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물컵들이 깨어났다. 그녀는 초록색의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과자를 내밀었다.

“이건 그냥 드리는 거예요. 한국분이시죠? 실크빌리지에 투숙하셨나요?”

그녀는 뻔하다는 듯이 변역기를 내밀었다. ‘장삿속일까? 친절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서 가장 값진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에서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녀는 망고 주스를 한 잔 내왔다. 달콤한 향이 코끝을 휘감아 왔다. 그녀는 10년이 넘게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들 둘을 키우며 힘들게 살았는데, 지금은 아이들이 취업을 해서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단다. 돈을 조금 더 벌어서 겨울이 있는 나라에 가서 눈을 보고 싶다고 했다. 4계절이 분명한 한국에서 1년쯤 살아보고 싶다는 그 빨간 아오자이의 그녀. 그녀의 웃음을 따라 일 년 살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세상의 오토바이가 다 몰려온 듯한 거리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바나나인지 코코넛인지 모를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 터널 사이로 자리 잡은 카페는 간밤의 시간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그대로 붙들고 있다. 작은 전구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니 맥주잔을 기울일만한 분위기를 좀 풍긴 것 같다. 사람이 다르면서도 같은 사람을 만나는 그런.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만난 베트남 여인. 그녀가 걸어왔고, 걷고 있는 삶은 여느 어머니들이 허위허위 걸었던 길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녀의 웃음 뒤에 얼핏얼핏 보이는 그늘도 가족들을 거두어 먹이고 가정을 지키는 모든 주부들의 땀이고 눈물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시간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공간들. 여행은 그곳에서 시작하고 매듭지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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