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우정은 놀라웠다

아내 친구의 5년 만의 한국 방문

by 준구

미국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나온다는 소식에 아내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4~5년 만에 다시 만나는 H는 아내의 대학 친구다. 둘은 벌써 한 달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무슨 선물을 사다 줄까 묻고, 입국의 라이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절친 몇몇은 격리가 끝나는 날에 맞춰 시내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호캉스를 겸해 밤새 수다를 떨 계획을 세우고 나니 동참할 친구들이 늘었다. 결국 룸 하나를 더 예약했다. 코로나의 불편함 속에서 10일간의 자가격리를 빼고 나면 고작 5일 남짓의 체류 기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해 서울의 친구들은 주도면밀하게 스케줄을 조정했다.

이번 방문은 아버님의 팔순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10여 일간의 격리를 감수하자니 남편과 아이들을 대동하는 것에도 무리가 따랐다. 친정에 묵어야 하는데 서로가 힘들 것 같아 혼자만 서울행을 선택했다. H의 아이들이 어릴 때는, 온통 아이들 케어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한국에 와서도 부모님과 형제자매와의 진득한 대화가 어려웠다. 잠시라도 눈을 팔면 금방이라도 튕겨져서 사고를 내고 마는 두 아들 녀석은 사랑스럽고도 버거웠다. 잠시의 방문일지언정, 미국인 남편이 한국의 문화와 풍습에 불편해하지는 않을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친정 엄마와 아빠가 힘들어하시는 기색을 느낄 땐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거나 따로 숙소를 구하는 편이 현명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그렇게, 좋고도 불편한 감정을 경험했기에 이번의 혈혈단신 방문이 얼마나 큰 해방감과 가벼움인지 모른다.


10여 일 간 친정에 격리되어서 엄마와 아빠 형제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50이 넘는 딸이 그의 엄마가 해주는 정성스러운 밥상을 아침저녁으로 대하며 그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해묵은 대화를 풀어 나갔다. 서로 말하기 좋아하는 가족이었지만 들어 줄이 없었던 가정에 이야기보따리가 풀렸다. 딸이 오랜만에 고국에 온 것을 계기로 노부부는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딸을 매게로 털어놓았다. 동생도 담아두었던 마음을 순순히 풀어놓았다. 가정에 감금된 시간이 서로의 해방구로 작용한 셈이다. 10일간의 격리가 끝나는 날 절친 대여섯 명이 시내의 모 호텔에 집결했다. 아내는 오후 반차를 내고 친구들을 만났다. 을지로에 위치한 20층의 숙소에서 바라보는 시내 전경은 그럴싸하고 멋졌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의 근황과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대화가 쉴 새가 없다. 호텔이 제공하는 점심과 저녁을 먹고 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간식과 음료로 밤 12시를 넘기는 중이다. 30여 년 전 처음으로 갖은 대학 MT의 체력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누군가 얘기하면 까르르 박장대소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자기의 사는 이야기, 건강 문제, 아이들 진학, 남편 이야기, 대통령 선거 등 이런저런 화재를 자유로이 바꿔가며 밤을 지세며 회포를 풀었다. 누가 졸기라도 하면 먹이고 깨우며 날밤을 세운 다음날 점심때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겨우 1시간만 자고 아침 먹고 집으로 왔노라고 했다. 한 시간이라는 말에 나는 뜨악해서 놀랐다. 30여 년 전 자신의 꿈과 미래를 논하던 친구들은 이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며 자기보단 남편과 자녀들의 얘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나이로 변했다.


H가 10일간의 격리를 마치는 날, 아침엔 일찌감치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잠시의 외출인데 아내는 그 시간에 맞춰 같이 걸으며 이야기한다며 나에게 차로 그의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H가 사는 동네로 갔다. 그의 집에서 보건소까지 차로 가면 금방인 거리를 굳이 걷겠다며 나선다. 나도 덩달아 길을 따라나섰다.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 보건소로 가는 길이 마치 산의 둘레길을 걷는 것 마냥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셋이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왕복 8 천보의 거리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으로 변했다. 친구들의 찐한 우정이 토요일 아침 방을 뒹굴고 있었을 나의 몸을 땀나며 걷게 만들었다.


드디어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그를 태워서 인천공항으로 데려다주게 되었다.

나는 전날까지 일을 마친 덕에 하루를 비울 수 있었고, 아내는 오후에 반차를 내서 공항으로 마중 나온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 그날 호텔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다른 친구의 차로 오겠다는 것이다. 떠나는 날까지 끝까지 친구를 배웅하겠다는 그 정성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H와 우리 부부는 20여 년 전에 유럽여행을 함께 했었다. 일주일은 함께 다니다 우리는 서유럽으로 그는 동유럽으로 일정을 잡아서 중간에 헤어지게 되었다. 아내와 나는 둘이지만 혼자서 씩씩하게 길을 나서는 그때의 그가 무척이나 용맹하고도 걱정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의 옆자리에 씩씩하게 올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이번엔 이별하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딸과 충분히 교감하며 나누는 시간을 가졌기에 아쉬움이 덜하셨던 것 같았다.


미국인 남편을 뒀으면서도 아직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그는 1 터미널에서 출국하는 일정인데 사람이 적었던 2 터미널의 PCR 검사를 예약한 것이다. 1과 2의 사이가 바로 옆에 붙어있겠거니 편의적으로 생각한 덕에 떠나는 시간까지 식은땀 나는 아찔한 경험들이 이어졌다. 나 역시 1 터미널에서 열차로만 2 터미널을 이동해봤던 터라 둘의 거리가 이렇게 멀고 셔틀로도 시간에 딱딱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2에서 1로 셔틀버스를 타고 시간에 맞춰 H를 비행기에 태웠지만 정작 나와 아내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는 2 터널로 다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셔틀버스는 1과 2 공항을 순항하는 노선이 있는가 하면 시내 곳곳을 순회하는 노선이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하염없이 돌다가 다시 버스를 바꿔 타고나서 날이 어둑해진 후 간신히 2 터널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의 한산한 모습


미국발 비행기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야 파킹 되어있는 차량으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H는 친구에게서 건네받은 책과 손편지를 펼쳐서 막 읽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친구들의 대단한 우정 앞에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헤맨 덕에 러시아워를 피해서 막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가 했던 말이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자기는 아는 사람은 많은데 이렇게까지 애써주는 친구는 많지 않은 것 같아”

부인할 수 없는 명쾌한 정리 같았다. 그랬다. '나도 이렇게까지 민폐와 짐일 수 있는 부담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살핌으로 느껴지는 입안의 혀와 같은 친구가 있다면 좋겠다.‘


그녀들의 우정이 쫌 많이 부러웠다.

'다음에 우리가 미국에 가서 복수해야 할 텐데.'

꼭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마음에서 일었다.



표지사진 : 롯데호텔 28층에서 바라 본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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