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미디어 환경 속의 KBS
소문난 음식점에는 늘 손님이 가득합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인 데다 식당도 몇 군데 없던 시절에는 늘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고객이 줄을 이으니, 이곳과 관련된 업체와 식자재를 대는 납품업체는 덩달아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에서 한둘씩 음식점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음식점을 필두로 스테이크 전문점, 베트남 요릿집, 타이, 프랑스, 이탈리아, 패스트푸드 등 다양하고 전문화된 요식업이 모여든 것입니다. 당장 손님의 이탈이 시작되었습니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원조 레스토랑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납품업체들도 굳이 그 원조 집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납품 단가가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도 않기에 장점이 사라진 것입니다.
고객들 역시 굳이 식당을 찾아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배달음식이나 간편식이 많아져서 사람들은 집에서 시키 먹거나, 간단히 차려 먹기 시작했습니다. 남이 해주는 요리에 싫증 난 사람들은 직접 만들어 먹었는데, 누군가의 레시피를 따라 하면 조리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 원조집의 오랜 단골은 나이가 들어갔고, 새로운 고객층은 수가 적을뿐더러 구미를 맞추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미각은 높아 가는데 정직한 재료를 써서 시각과 미각을 충족시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비용 대비 수익성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원조 레스토랑의 가치를 알기에 사람들이 큰돈을 내면서까지 맛과 품격을 유지해 달라고 하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릅니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지급하면서 조금이라도 가격을 올릴라치면 심리적 저항에 부딪힙니다. 경쟁하는 음식점들은 후발 주자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호객행위를 하는데 고급 레스토랑은 원조집이라는 이유로 품격을 유지하라는 제지를 받습니다. 불공정한 처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상은 지상파 방송사가 당면한 현실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고, 공영방송을 원조 레스토랑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경영적인 측면에서 방송을 논하면, 방송사는 시간을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방송사의 주된 수입은 기업에 광고를 팔아서 얻습니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앞뒤에 상품광고가 노출되면 기업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어 제품을 손쉽게 판매할 수 있습니다. 방송광고는 기업이 다수의 소비자에게 제품을 알릴 수 있는 매력적인 기회인 것입니다. 방송사는 기업에게 시청률로 어필합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자사 방송의 드라마나 뉴스 시간에 TV를 시청하니 그 시간대에 광고를 붙이라고 제안합니다. 시청률이 높은 방송사의 시간대를 기업 역시 선호합니다. 방송사가 시청률에 집착하는 이윱니다. 그렇다고 억지스러운 막장드라마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것엔 한계가 있고, 신뢰할 수 없는 뉴스로 시청자를 붙들 수도 없습니다.
9시엔 9시 뉴스, 8시엔 드라마, 5시엔 초등 애니메이션으로 굳어진 TV 시청 습관은 더욱 희미해졌습니다. 실시간 방송되는 본방 시간에 맞추려고 발을 동동 대거나,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송사의 콘텐츠를 꼭 TV라는 디바이스로 소비할 필요가 없어졌고, 언제든 다시 보기도 가능합니다. IPTV, 네이버, 다음, 유튜브, OTT, 토렌트의 플랫폼을 통해서, PC 모니터, 패드, 모바일 등 다양한 디바이스로 언제든 시청할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웨이브 등에는 콘텐츠가 넘쳐납니다. 기업은 자신이 지출한 광고비가 상품의 매출로 이어지는 정확한 경로의 플랫폼과 디바이스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지상파 광고의 이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장 상황이 안 좋아서 기업이 광고비 지출을 줄이기도 합니다. 파이는 한정되어 있는데 동종업종이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최근에 방송한 “KBS 대기획 23.5”를 시청했습니다. 가슴 뿌듯했습니다.
완성도 높은 다큐멘터리를 BBC나 디스커버리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벅차게 기뻤습니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되는 작업에 자사 부담금 외에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외부 제작비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대작이었습니다. 공영방송에 시청료를 거둬서 지원하는 것은, 외부의 압력이나 지나친 상업성에 치우치지 말고 공익성과 공공성을 담보해 달라는 염원에서 일 것입니다. 시청자 역시 그러한 마음을 담아 소정의 비용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공영방송의 역할이 미비했다거나 편향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수신료 거부란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영국 국민이 자신의 공영방송인 BBC에 내는 돈에 비하면, KBS는 얼마 되지도 않는 금액을 받는 셈인데, 주는 사람이 너무 생색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질나게 도와주면서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공영방송사로서는 짜증스러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중간광고 허용 여부도 지상파가 상대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질의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는 게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많지 않은 수신료로도 선방하고 있는 EBS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공영방송사는 이제 수년 내로 다수의 인력을 정년퇴직으로 내보냅니다. 한동안 경제 침체와 과도한 인력으로 새로운 피를 수혈하지 못했었는데 좀 숨통이 트이게 됩니다. 한번 입성하면 정년이 보장되어 내몰리지 않는다는 점은 노동자에게 크나큰 안정감이며 복입니다. 그런 편안함이 때론 안일함이나 능동적 창조성을 저해하는 요인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양질의 일자리는 중요합니다. KBS는 신입 인력을 선발할 때 공정하고 균형 있게 사람을 고루 뽑아, 유능한 방송인을 키우는 곳입니다. 다만 자신들이 선발되어서 누리는 권리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애플이 칭찬받았던 이유는 애플의 생태계 안에서 서로가 살아가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대기업들만 갑질과 횡포를 일삼는 것이 아닙니다. 방송사가 외부 제작사와 관계 맺는 행태에서, 계약서의 내용에서, 제작비를 다룸에 있어서, 노동강도에 있어서, 위험의 외주화 등에 대한 성찰이 뒤따르면 좋겠습니다. 방송사 내에서도 천차만별인 정규직, 비정규직, 특수계약직, 알바, 하청 등의 관계로 얼룩져 있는데, 이를 도외시한 채 다른 대기업의 행태만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자신을 비추는 일에는 둔감한 모습입니다. 어느 집단에게나 투명하고 공정한 눈으로 정의의 잣대를 제시하는 공영방송의 역할과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언론사 신뢰도에서 수년째 최 상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임을 압니다. 이 사회의 빛으로 등불로 소임을 다해 주실 것을 거듭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방송과 언론의 선두에서, 노조를 결성할 수도 없고, 노조의 보호를 기대할 수도 없는 사회 곳곳의 그늘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과 권력을 쥔 강자에게 의연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에게는 따듯하게, 우리 사회를 정의로움으로 밝혀 주시길 기대합니다.
해외에 나가서 KBS 월드를 보며 큰 자부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대하는 사람은 더 많은 수신료로 지불하더라도 양질의 콘텐츠가 생산되기를 바랍니다. 외국에 비하면 적은 제작비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왔기에, 더 투여되는 자본은 더 창의적인 콘텐츠로 열매 맺으리라 믿습니다.
KBS가 짊어진 공영방송의 무게와 사명은
우리 역사에서 결단코 가볍지 않으며
그 발걸음은 곧 다른 이들의 길이 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