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깃들고 일상이 회복되기를
따스 해진 봄을 맞으니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겨우내 동면에 들어간 곰처럼 각자의 처소에서 웅크리며 살다가 봄날의 손짓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온 격이다. 영상 제작 일이라는 게 더위와 추위에 약해서 그즈음이 비수기라지만 지난겨울은 더욱 혹독했다. 그나마 간간히 잡혔던 제작과 중계 행사 일정이 취소와 연기되면서 현장에서 스텝들을 만나는 일이 전무했다.
계엄의 후폭풍을 피해 간 분야가 없겠지만 영상에 종사하는 업체와 프리랜서에게도 혹독함을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랬던 사람들이었기에 현장에서 다시 마주하며 안부를 물을 수 있음은 실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지난 두 주간 쉴 새 없이 숨 가쁜 제작 일정을 소화했다. 봄에 언 땅에서 새순이 돋아나듯 때가 되니 일이 들어왔다. 위축된 겨우내 이런저런 기획서를 써보고 제안서도 돌려봤지만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국가 기관의 제작지원을 받는 일은 점점 하늘의 별따기였다.
가뭄에 콩 나듯 겨우 입질해 오는 일은 비용이 터무니없는 경우가 많았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머리를 굴려서 알뜰하게 제작해 봐야 겨우 인건비를 건지는 일이다. 제작비가 타이트하게 정해져 있으니 모든 스텝을 갖춰 제작하기엔 비용 감당이 안돼, 1인 다역을 감당하는 건 필수다.
어떤 프로젝트에는 전체 진행을 맡는 프로듀싱을 맡았고 다른 건에서는 현장 디렉팅을 수행했다.
카메라 감독의 수가 부족하면 카메라를 잡는 것은 당연하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시작하는 일이 아닌 경우엔 중도에 파기될 위험이 있어서 작가를 따로 붙일 수가 없다. 그럴 때면 구성작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영상 제작 분야의 고인 물이라 이런저런 역할도 중간 이상은 해내니,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된 셈이다. 어떤 피디는 후반 편집까지 화려하게 구사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까지 하기엔 체력이 버텨내지 못하니 거기까지는 욕심내지 않는다.
아무튼 변화무쌍한 영상제작 현장의 흐름 속에서 계속 밥술이나 떠먹으려면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 만의 영상트렌드와 문법이 있고 제작 시스템과 장비도 천차만별이다.
우직하게 지미집을 조립해서 운용하는 카메라 감독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고 ENG 감독과도 반가운 악수를 했다. 추운 겨울을 견뎌서 지긋한 나이에 다시 현장에서 만난 것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악수에는 서로를 향한 격려의 온기가 실렸다.
서울 외곽의 스튜디오에서는 여름성경학교 때 사용 할 율동 영상을 촬영했고, 야외에서는 시리아 난민으로 구성된 유소년 축구단의 국내 일정을 팔로우했다. 서울 시내의 대형 교회 시설에서 열린 세미나를 중계했고, 중앙부처의 홍보영상을 위해 세종을 방문했다.
광화문을 지나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고, 헌법재판소 앞 길에서는 심한 정체 끝에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길 위에 선 시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상을 회복한다는 것
혼란이 수습된다는 것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
성숙한 숙의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는 시간을 살고 있다.
허나 어쩌랴
길은 가야 하고
미래는 오늘보다 나아지길
봄기운에 의지해
내일은 행복하길 빈다.
표지 : 여름성경학교용 율동 영상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