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화
“언니, 자?”
“말똥말똥해.”
“공단으로 감싼 물건이 뭘까. 유파가 편지를 읽으면서 되게 당황하는 표정이었어. 엄마한테 무슨 말 들은 거 없어?”
“죄인 취급하는 나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비밀스런 물건인가 봐. 어쨌든 무사히 전달했으면 됐지, 뭐.”
우리는 파란색 모기장이 높다랗게 둘러쳐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겨우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 아파트 주변이 한밤중처럼 적요하다. 유파는 우리의 방문이 꽤나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진정 반가웠다면 한국에서 날아온 일가붙이를 이토록 빨리 재우진 않을 테니까. 달빛이 모기장으로 흐릿하게 스며들었다. 파란 안개에 휩싸인 듯하다. 이 자연적인 조명이 언니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꺽다리 선풍기가 머리를 이리저리 내두르며 조용한 소음을 일으킨다. 선풍기가 이쪽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모기장이 흔들려 마치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다.
“풀벌레가 우는 줄 알았는데 초침 소리였네. 언니, 아까 유파가 내뱉은 ‘까이쓰더’란 말이 무슨 뜻일까. 표정으로 봐선 ‘재수 없어’, 아니면 ‘젠장’, 이런 의미 같던데.”
나는 모기장 밖으로 손을 뻗어 손목시계를 집어 들며 말했다. 언니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 침묵 사이로 엄마의 간절한 당부가 들려온다. 오늘 아침 위해여객터미널에 입항하여 엄마한테 전화를 걸자 어떻게든 언니의 마음을 되돌려 놓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니 아버지가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기 전에 그 인간부터 작살내 버리겠대. 얘, 이러다 정말 뭔 일 나겠어” 엄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진정시키려고 이 말 저 말 건넸는데 엄마는 안심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여독이 온몸을 휘감고 있지만 졸음은 얼씬거리지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아본 중국의 땅에 설렘이 깃들기는커녕 어째 불안불안하다. 멀미 때문에 여객선 안에서 밤새 뒤척이던 언니는 어느새 곯아떨어졌다.
새들이 요란하게 울어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언니는 어느새 일어나 머리까지 감고 화장을 하고 있었다. 집 안은 고요했다. 욕실이 비어있으니 얼른 씻고 나오라며 언니가 내 등을 떠민다. 눈에서 잠기가 가시자 뜬금없이 배가 고팠다. 갓 구운 김 특유의 고소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총각김치, 시래기고등어조림, 계란찜 등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오롯이 살아난 미각이 여기가 타국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케 한다.
유파가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며 창밖의 중국 여자와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모국어가 아닌 중국어로 말할 때 유파는 친근하고 자연스럽다. 유파가 한국어를 구사하는 순간 그녀는 대번 차갑고 낯설어진다. 유파의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유파가 우리를 보더니 억지로 웃는다. 인중이 길고 미간이 좁아서 그런지 유파는 미소 짓고 있어도 고집스럽게 보인다. 유파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꽃가루처럼 떠다니던 자잘한 소문들이 되살아났다. 유파의 아이들을 보면서는 누가 기찻길 옆 단칸방에서 태어났을까 살피게 되고, 평생 병마와 싸웠다던 남편도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우리가 먹는 밥상에 수저만 올려놨어. 하루가 사십 팔 시간이라고 해도 모자란 처지라 음식 장만할 틈이 있어야지.”
유파가 알루미늄 냄비를 식탁에 올려놨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댄 흔적이 있는 김치찌개였다.
“아이들은 어디 갔어요?”
“일찌감치 아침밥 먹고 공부방에서 자습하고 있어.”
“방학인데도요?”
“방학 때가 아니면 뒤쳐진 성적을 언제 보충해. 방학 동안 나사를 힘껏 조여야지.”
유파가 행주를 꽉 짜면서 말한다. 언니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근사근 굴면서 말꼬리를 이어갔다. 중국에서 무말랭이와 깻잎을 먹게 될 줄 몰랐다면서 성의 없는 식탁을 치켜세웠다.
“내가 오전 열한 시부터 한국인 관광객을 태우고 유적지를 다녀야 해. 우리 아이들은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내가 짜준 계획표대로 공부하거든. 중간에 수학이랑 중국어 과외 선생이 와. 집에 손님이 있으면 아이들이 아무래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잖아도 일찍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중국 여행이 처음인데 심부름만 하고 돌아갈순 없잖아요. 서울에서 올 때 위해의 관광명소를 알아놨어요.”
언니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위해의 관광명소를 알아뒀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자고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언니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아침밥을 먹은 후 곧장 불구덩 속을 헤매야 한다. 공연히 눈치를 보며 굽실거리는 언니의 태도도 못마땅하다. 여전히 찌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어느 누구의 안부도 묻지 않는 유파의 행동거지도 눈에 거슬린다. 겸사겸사 들른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기 때문에 시간을 쪼갠 우리를 이렇게 푸대접할 수는 없었다.
“자, 이거 받아. 비행기 티켓이야. 내가 딱히 해줄 건 없고…… 관광하려면 승용차를 대절해. 그게 실속 있고 편해. 가이드는 내가 소개시켜 줄게.”
유파가 식탁 위에 넓적한 봉투를 올려놓고는 빈 그릇을 치웠다.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고맙다기보다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 무안해진다. 우리가 위해공항에서 타야하는 비행기의 탑승 시간은 토요일 낮 열두 시였다.
“토요일이면 내일인데? 저 여자 너무 뻣세게 군다. 오늘 출발하는 티켓을 끊고 싶었는데 좌석이 없었나 봐? 아, 기분 나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항공권으로 부채질을 하며 유파를 힐난했다. 친척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군더더기 없는 성격 같아서 좋은데, 뭐. 겉으로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뒤에서 흉보는 것보다 낫지. 우리가 불청객인 것도 사실이잖니.”
언니는 유파를 감싸고돌았다. 언니를 심부름꾼으로 지목한 아버지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유파의 생활 면면을 눈여겨보는 언니의 얼굴이 의외로 밝았기 때문이다. 어째 일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창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너무 파래서 빈틈없이 꽉 막힌 것 듯한 하늘은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