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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안개

단편소설 6화

by 김설원

우리는 성산두 정문으로 들어갔다. 왕링과는 두 시간 후 만나기로 했다. 성산두는 안개에 덮여 있었다. 안개 속을 거니는 관광객들이 순간순간 유령처럼 보여 좀 으스스했다. 정교한 조각상들이나 화려한 사원들에 대한 설명이 죄다 한문으로 적혀 있어서 나는 생김새만 훑어보고 다녔다. 거대한 석상들 앞에서는 그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점점 농밀해지는 안개가 감상을 방해했다. 안개라는 랩으로 몸을 친친 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니는 어디론가 부지런히 걸어갔다.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발걸음이었다. 안개 속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언니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형체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라면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어야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언니의 손을 잡고 싶은데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유품의 심부름꾼이 반드시 언니여야 하는 이유를 나는 재깍 알아챘다. 물론 언니도 대번 짐작했을 것이다. 부모의 뜻을 철저히 무시한 채 자기 고집대로 꾸린 삶의 모습이 어떤지, 홀몸으로 남매를 키우며 근근이 살아갈 게 뻔한 권주옥을 본보기 삼아 마음을 되돌리라는 엄중한 경고.

나는 안개에 젖으며 언니를 쫓아갔다. 으리으리한 석상들이 일제히 입김을 토해내고 있는 듯하다.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안개에 휘감긴 모습들이 기묘하다. 그때 언니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언니를 따라 샛길로 들어서자 풀숲 사이로 나무 계단이 구불구불 놓여 있었다. 성산두 입구 쪽의 안개가 빡빡하게 뭉쳐 있는 듯한 느낌이라면 이쪽의 안개는 하얀 치맛자락이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 같다. 안개는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지나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런 안개 앞에서 자주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른 내려와 봐. 바다야, 바다.”

망망대해가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며 위엄스럽게 뒤척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앞에서 나는 꼼짝하지 않은 채 숨만 할딱거렸다. 이번에는 빈틈없이 들어찬 안개가 마치 바다를 보필하는 듬직한 신하처럼 보였다. 띠를 두른 모양으로 빼곡하게 자리한 나무들에게서는 신령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대한 백사(白蛇))가 느릿느릿 기어가는 듯한 산책로가 저 멀리까지 뻗어 있다.

“정말 굉장하다. 현실 세계가 아닌 것 같아. 언니는 이곳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

“여기 오기 전에 검색해 봤어. 성산두는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어서 중국의 희망봉으로 불린대. 저 바다 건너편이 우리나라야.”

성산두는 태양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진시황이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서 배를 띄웠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언니는 휴대전화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관광객은 우리가 전부였다. 언니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안개가 잔뜩 꼈는데 사진은 찍어서 뭐해. 나는 눈에 담아 갈래. 태어나서 이런 안개는 처음 봐. 무슨 블랙홀에 빠져드는 기분이야. 안개 블랙홀. 광대한 바다 앞에 서니까 정말 내가 미물처럼 느껴진다. 역시 자연이 우리보다 한 수 위야. 관광객들이 이 바닷길 산책로를 모르나? 안개 속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이 공간이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네. 언니, 분위기도 잡혔는데 나한테 솔직히 털어놔봐.”

“뭘.”

“그 충격 선언 말이야.”

“다 털어놨는데 뭘 또 털어놓으래? 솔직하게, 충분히 말했어. 결혼은 하기 싫은데 아이는 꼭 낳아서 기르고 싶다고.”

“듣는 입장에선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어떤 남자한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거나, 언니한테 무슨 결격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 아이를 낳아서 키우겠대? 언니는 남편이 필요 없다 치자. 아이는 무슨 죄야? 왜 아이한테서 아버지의 자리를 잔인하게 도려내? 이게 폭력이지 뭐야.”

“난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싫어. 두 사람이 법적으로 묶이는 순간 니가 말하는 다양한 폭력의 종자들이 자리를 잡고서 발아할 때를 기다릴 거야. 흔히 결혼하면 안정을 얻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회의적이야. 안정이 아니라 속박이면 또 모를까. 그 속박은 결국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테고. 난 여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이 출산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 축복만큼은 누리겠다는 거야. 삶의 복장은 저마다 다른데 그 다양성에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무시하면 그거야 말로 폭력이지.”

“생각이 나랑 완전히 반대네. 이 단단한 벽을 어쩐다…… 애는 낳아 놓기만 하면 저절로 커?”

“당연히 각오를 다졌지. 출산은 막중한 책임을 전제로 하니까. 적어도 무책임한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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