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언니는 시간강사로 일한다. 모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천 년대 초반에 ‘세무사하동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실하게 달려온 아버지는 당신의 맏딸이 대학 사회에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니는 어떤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착실히 걸어갔다. 부모님은 그런 언니의 행보를 대견스러워한 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혼은 하지 않고 아이만 낳아서 기르고 싶어요.”
지난 추석 때 산소에 다녀온 언니가 하필이면 밥상머리에서 꺼낸 폭탄선언이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동시에 수저를 놓았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내가 설마, 하며 짐작하는 그림은 상상도 못할 테니까. 언니가 현재 임신을 했다는 건지, 아니면 임신 계획을 밝힌 건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아버지 또한 언니의 비장한 표정을 읽었는지 일단 냉수부터 들이켰다. 그러더니 유부남을 사귀고 있느냐, 아니면 어떤 놈이 너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내뺐느냐며 노골적으로 쏘아댔다.
“얘가 미쳤네, 미쳤어. 니가 지금 누구처럼 집안 망신을 시킬 셈이냐? 박사까지 뒷바라지 했더니 결국 미혼모가 되겠다고?”
언니가 되고 싶어 하는 ‘비혼모’를 ‘미혼모’로 해석한 엄마의 몸은 무슨 지뢰처럼 건들기만 하면 금방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엄마의 질타 속에서 도드라진 ‘누구처럼’은 권주옥, 그러니까 유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만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고, 언니는 철저히 감시를 받았다. 매사에 신중한 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백이었으니 부모님이 설미지근하게 다룰 리 만무했다. 언니는 충분히 짐작한 일이라는 듯 그 감시를 묵묵히 견디면서 오히려 자신의 결정을 감쌌다. 언니의 행동이나 말투, 눈빛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모 자식 간의 신경전이 팽팽해질수록 나는 언니를 미행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부모님에게는 망발로 들릴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언니라면 어떤 경우 가출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미행의 욕구를 해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박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는 아버지의 엄명도, 엄마가 무엇에 쫓기듯 마련하는 맞선 자리도 언니는 무시해 버렸다. 누군가의 고약한 마술에 걸려 언니와 외모만 똑같은 여자가 우리 집에서 숙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피붙이라도 그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겠지만 언니가 일으킨 사건은 그야말로 놀라운 반전이었다. 언니에게 감쪽같이 속은 기분인데 부모님의 심정은 오죽할까.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을 나는 언니를 통해 제대로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