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까지 우리를 관광지로 안내할 ‘왕링’은 한국말을 곧잘 했다. 언니가 칭찬하자 왕링이 ‘한국어 교본’을 들어 보이더니 “일본말도 조금 할 줄 알아요” 라고 말하며 귀엽게 으스댔다. 내일 낮 12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오늘 굳이 관광지를 돌아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렇듯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말이다. 북경이나 상하이라면 몰라도 지저분하고 후진 시골에 나는 일절 흥미가 없었다. 그 무지막지한 택시를 떠올리면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어제 여객터미널로 마중 나온 유파를 따라 우리는 택시를 타고 중국 식당으로 갔다. 택시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모양새였다. 케케묵은 시대를 재현시킨 야외 세트장에 들어선 기분마저 들었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교도소 면회실의 쇠창살 같은 가림막이 있었는데, 언제든 강도가 들이댈 수 있는 흉기에 대비한 보호 장치라고 했다. 특히 여름이면 강도나 날치기, 좀도둑들이 활개를 친다고 유파가 말해줬다. 이런 곳이라면 어느 순간 택시기사도 악마의 탈을 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나는 택시의 도어레버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바로 도어레버를 열고 뛰어내릴 심산으로.
왕링은 제 밥벌이 수단인 독일제 자동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뿌듯함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내 눈에는 말만 외제차지 연식이 오래된 중고 승용차로 보였다. 그렇긴 해도 쇠창살이 있는 택시와 비교하니까 큰 환대를 받는 것 같아 감지덕지 어쩔 줄 몰랐다. 왕링이 운전해 주는 승용차의 하루 대여료는 우리나라 돈으로 오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왕링이 가이드 역할까지 해준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태양이 제 힘을 보란 듯 과시하고 있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손등을 콕콕 쪼아댔다. 볼수록 순박하게 생긴 왕링은 “더워?” “시원해?” 하면서 에어컨을 조절했다. 누렇거나 검은 가축을 끌고 가는 농부가 널찍하고 한산한 도로의 소품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왕링은 한국의 유행가요를 틀어놓고 신나게 액셀을 밟았다. 타국의 옹색한 도시에서 듣는 유행가가 고향 친구처럼 반가웠다. 시원하게 질주하는 승용차에 몸을 맡기니까 옹졸해진 마음이 좀 풀어진다. 왕링의 한국어 실력에 한계가 있어서 의사소통에 빨간불이 켜질 때는 중국어 회화 포켓북의 도움을 받았다.
“유파, 친구?”
“아니, 우리 친척.”
“치인쵹?”
“친척 몰라? 가만 있자, 여기 있다, ‘친치’, 발음이 비슷하네. 참, 왕링, ‘까이쓰더’가 무슨 뜻이야?”
“응? 뭐? 까이쎄더? 아, 까이쓰더. 욕이야, 비르머글.”
“비르머글? 언니, 왕링이 뭐라는 거야?”
“빌어먹을 이라잖아.”
왕링이 맞아, 맞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파가 좋은 사람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유파도 자기처럼 이런 승용차를 몰면서 돈을 번다고 했다. 더듬더듬 쏟아내는 왕링의 말을 조합해보니 이 승용차는 다목적 고급 임대 택시였다.
“난 관광객 전용 승용찬 줄 알았는데 장거리를 뛰는 택신가 봐. 그러니까 유파가 택시기사라는 거잖아. 관광객이 아니고서야 이런 고급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이런 촌구석에 얼마나 있겠어. 택시기사 수입으로 어떻게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며 살지?”
“엄마니까 가능하지.”
권주옥에 대한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던 반면 남편은 생사조차 불분명했다. 나는 권주옥의 사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어쩌다 그녀의 근황을 전해 들으면 그런가 보다 했다. 아예 중국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만 잠시 권주옥을 떠올렸을 뿐이다. 혼자 몸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모국을 등진 권주옥의 용기가 놀랍다 못해 묘한 열등감마저 느껴졌다. 안정된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권주옥처럼 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동경조차 하지 않았다. 사랑이야 말로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행복과 직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현실을 무시한 채 마음이 시키는 대로 꽃을 피운 사랑의 뒤끝에는 결국 가시만 남는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나는 웬만큼 조건을 갖춘 남자와 제때 결혼하고, 출산하고, 집을 장만하는 삶의 수순을 밟을 것이다. 그게 결혼이든 뭐든 어떤 틀에 맞춰 꾸려가는 삶의 형태가 안전하고 편했다.
“왕링, 성산두로 가요.”
“성산두? 장보고 유적지로 가는 거 아냐?”
언니가 왕링에게 행선지를 말하자 왕링의 목소리가 가볍게 튀어 올랐다. 유파가 왕링에게 오늘의 관광코스를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 어느 길로 접어들어도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텅 빈 도로와 고요하게 출렁이는 바다와 울울창창한 산들을 오늘 하루만 우리가 차지한 것 같았다. 언니는 다소곳이 앉아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입술 아래 발갛게 돋아나 밤새 더 부풀어 오른, 약을 먹고 연고를 발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뾰루지가 언니의 무모한 의지처럼 비쳤다. 나는 이제까지 언니가 책밖에 모르는 숙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종이었다. 설마 언니가 그런 삶의 모델하우스를 충동구매 하듯 뚝딱 지어올린 건 아닐 터였다. 차라리 그런 충동구매라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순간 확 끓어오르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저지른 충동구매는 대개 후회도 빠르니까. 하지만 언니의 구매 행위는 꼼꼼하고 철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