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면 거부하고, 싫으면 취소하는,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다
인터넷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과학적 사실과 비과학적 사실이 난무하고,
타당성을 가진 주장과 사이비·이단의 주장이 공존하며, 사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내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기 어렵고, 퍼뜨리기는 것은 더 어려웠는데,
지금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누구나 순식간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여러가지 조건이 잘 갖춰지면, 비교적 쉽고 빠르게 퍼뜨릴 수 있다.
이런 특성이야 말로 인터넷의 낭만이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으니, 못할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정보가 있고, 의지가 있고, 행동으로 옮길 실천력과 추진력,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내 의견을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공유할 수 있는 낭만.
내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정보와 콘텐츠를 줄 수 있는 낭만,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빠르게 정보와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는 낭만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 한 마디씩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한 마디씩 한 것을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이렇게 여러사람이 가진 다양한 의견을 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선입견을 수정해나가고, 편견을 감소시키며, 고정관념을 해소할 수 있는 세상.
인터넷이 꿈꾸던 세상은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인터넷이 등장한 1990년(제3차 산업혁명) 이후로 그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본 적이 없다는 것 말이다.
우리 삶이 편리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는 자기 스스로 앱을 깔아서 일일이 다 조작해야 한다.
기술에 적응해야 하고, 기술을 배웠기에 편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실제로는 개개인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IT기술은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가(서비스업 종사들이) 해주던 일을 개개인이 직접 하도록 떠넘겼을 뿐이다.
비행기 예약과 호텔 예약도 은행거래도, 서류를 발급하는 일도 누군가 나 대신 해줬었다.
그런데 이제는 개개인 직접하면서 자신의 힘과 시간과 인내심을 소비해야 한다.
인터넷과 IT기술은 그것으로 돈 버는 기업에게나 편리한 기술이지 개개인에게는 편리한 기술이 아니다.
그들이야 만들어 놓고, 운영하고 관리하면 끝이지만, 사용자들은 끝도 없이 뭔가를 직접 처리해야만 한다.
어쩌겠는가. 이미 이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을.
이 정도 문제는 그냥 없다고 치고 넘어가 주겠다.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도 충분히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있으니, 일단 넘어가자는 의미다.
더 큰 문제가 뭐냐고? 인터넷이 확산된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문화가 그것이다.
이 새로운 문화는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다.
앞으로도 이런 문화가 지속된다면, 뭔가 큰 일이 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미 큰 일이 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터넷이 내 의견을 공개하고, 내 의견을 공유하기 쉬운 공간이라는 것이 이 새로운 문화의 원인이 되었다.
인터넷이 등장할 때의 희망은 인터넷으로 인해 다양한 의견 개진과 다양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져서
사회적 갈등, 국민적 갈등, 편견, 혐오, 고정관념이 줄어드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오히려 이런 희망과는 반대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에 공개하거나 공유한 자신의 의견이나 선호는
자신과 다른 의견들을 보게 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표명한 의견과 비슷한 것들만 계속 접하게 하고,
자신이 표현한 선호에 부합하는 정보들만 계속 만나게 하며,
자신의 공유한 것들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콘텐츠만 계속 추천를 받게 된다.
인터넷이 희망했던 것처럼 다양한 의견을 보면서 다양한 이견들도 수용할 줄 알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포용할 줄 알게 된 건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의견들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려
생각이 한 방향으로 고착된 사람들이 증가했다.
인터넷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을 부추기고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태도, 선호를 보이는 사람들을 관용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
인터넷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연습시키지 못한다.
인터넷은 같음만인 진실이라고, 우리끼리만 똘똘 뭉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인터넷은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법을 학습시키지 못한다.
인터넷은 그들은 적이라고, 그들은 혐오해야 한다고, 그들은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자 괴물이라고 가르친다.
같으면 구독하다가, 좀 다른 것 같으면 구독 취소하고,
같으면 좋아요를 눌렀다고, 좀 다른 것 같으면 싫어요를 누르고,
같으면 들었다가, 좀 다른 것 같으면 듣지 않고, 온갖 댓글 테러를 해놓는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이 만든 새로운 문화, '캔슬 컬처(Cancel Culture)'다.
캔슬 컬처는 우리말로 거부 문화, 취소 문화라고 번역될 수 있는 용어다.
다르면 거부하고, 싫으면 취소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문화에 스며든 사람들에게 달라도 들어보라고, 싫어도 읽어보라는 하는 건 무용하다.
이 문화가 깊이 자리잡은 인터넷 세대는 다르면 안 듣고, 싫으면 안 본다.
관용 따위는 없다. 배려 따위는 없다. 인내하지 않는다. 참지 않는다. 그게 멋있다고 착각한다.
거부하고, 취소하며 참지 않는 훈련이 정서 조절 장애 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입맛에 맞는 이야기는 듣고, 아니면 듣지 않고 바로 딴짓을 한다.
교수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자신이 듣고 싶었던 과목에 수강 신청이 성공하면 열심히 듣고,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과목은 듣지 않고, 시간을 떼운다. 그러면서 학점을 잘 달라고 한다.
왜 A0와 B0를 주냐고, 다 '+'을 달아 달라고 염치도 없이 요구를 해댄다.
이 모든 것이 캔슬 컬처다.
수 틀리면 다 취소해버리고, 거부해버리는 인터넷이 만들어낸 괴물같은 문화다.
캔슬 컬처에 지배당한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되는 20년 정도 후에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괜찮을까? 20년 뒤에는 캔슬 컬처를 이겨내고, 배려와 관용이 있는 어른이 되어 있을까?
제발. 제발. 내 우려가 기우이길(지나친 걱정이었길) 바란다.
*참고문헌
Clark, M. D. (2020). DRAG THEM: A brief etymology of so-called “cancel culture”. Communication and the Public, 5(3-4), 88-92.
*표지 그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