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굴업도 백패킹
섬에 가기로 했다. 제주를 제외하고 섬 여행은 처음이라 배 표를 끊는 법부터 찾아봐야 했다. 우리가 가는 섬에는 슈퍼도 식당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굴업도에 간다.
굴업도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한번 갈아타고 가야 한다. 덕적도라는 섬에서 굴업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홀수날과 짝수날 배가 도는 방향이 달라 짝수날에 가게 되면 시간이 두배로 걸린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덕적도는 정말 큰 섬이었다. 굴업도에서 하룻밤 묵은 후, 나올 때도 마찬가지로 덕적도에 들리게 되는데 그때 하나로마트와 줄지은 식당, 기다리는 택시들을 보며 덕적도는 정말 큰 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굴업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자연과 사슴들이 있을 뿐이었다.
배를 타고 2시간 이상 가야 하기 때문에 가방에서 캠핑용 베개를 꺼내 바람을 불었다. 베개를 베고 편하게 누워 있으니 울렁울렁 배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덕적도에 도착해 더 작은 배로 갈아타고 나서는 의자를 펴서 앉았다. 바다 풍경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크 좌석이 만들어졌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캠핑장비들을 이용해 편하게 이동을 하고 있었다.
굴업도 선착장에 배가 서자 여러 트럭이 사람들을 태웠다. 굴업도에 몇 없는 집들은 민박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트럭에 올라타고 금세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전에 민박을 예약한 사람들과 몇몇은 현장에서 기사님께 여쭤보고 트럭에 탄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런 요령이 없기도 하거니와 지도로 봤을 때 걸을만하다 생각되어 그냥 걷기로 했다. 잠시 화장실에 들리고 가방을 정비하는 사이에 트럭들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길의 끝에 당도했을 때 우리가 걸어간 이 길이 굴업도 마을로 난 유일한 도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한 마을의 시작과 끝을 걸은 것이다. 그렇게나 작은 섬이었다.
우리는 마을까지 걸은 후 마을에서 다시 개머리 언덕까지 산길을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걷자. 걷는 동안 처음엔 오른편에 바다가, 마을을 지나 걸어 들어가니 이번엔 왼편에 바다가 나타났다. 계속해서 좌우를 번갈아가며, 고요하고 사람 없는 해변이 우리와 함께 했다.
마치 영화 <안경>에 나오는 해변 같았다.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간히 걷는 사람이 보였지만 마주 지나며 '안녕하세요' 건네는 인사 외에는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우리도 '좋다, 좋다' 이 말 밖에는 별다른 대화 없이 풍경에 빠져 걸었다.
본격적으로 개머리 언덕 쪽 산길로 들어서자 등산이 시작됐다. 등산이라 부르기도 어울리지 않는 짧고 완만한, 말 그대로 언덕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양쪽으로 강아지풀 밭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평평하고 완만한 대지에 잔디와 강아지풀이 이불처럼 덮여 있었다.
걷는 게 너무나 즐거웠다. 작은 섬이라 바다가 양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트럭을 타고 온 사람들은 마을 이장님 댁이나 민박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들 식사 중이라 우리가 걷는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 살면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내가 아직 국내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앞에 보이는 풍경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굴업도는 화산지형으로 이루어진 섬이라고 한다. 화산지형만의 매력이 넘치는 섬이었다. 몇 걸음 뗄 때마다 풍경을 보느라 개머리 언덕에 당도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어려운 구간도 없이 완만한 등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되었다.
둘 다 육지에만 살아봐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양 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그렇게 좋았다. 바람에서도 바다 맛이 났다. 날씨가 우리 편을 들어주었다. 지금 우리가 굴업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걸을수록 억새와 강아지풀의 양이 많아졌다. 풀로 뒤덮인 언덕은 옆으로 폭 쓰러져도 푸근하게 받아줄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만든 외길을 따라 느긋이 걸어 나갔다.
얼마쯤 걸었을까. 멀리 개머리 언덕이 보였다. 벌써 바지런한 사람들이 텐트를 쳐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개머리 언덕 위에 텐트를 치지 않고 풍광이 넓게 보이는 자리를 찾기로 했다. 개머리 언덕 위는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텐트를 치기에 쉽지 않아 보였다.
개머리 언덕의 바람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바람을 막아줄 나무가 없고 언덕 둘레가 모두 바다이다 보니 강렬한 바닷바람이 우리 박배낭까지 날려버릴 기세로 불어왔다. 바람이 강할 때 집을 짓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저것 날아갈 수 있는 가벼운 물건들을 모두 챙기며 텐트 폴대도 잡고 이너텐트도 펼치고 할 일이 많다 보니 손이 두 개로는 모자랐다. 우리는 언덕 높은 쪽, 바람이 덜 부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준비해 간 비건 만두와 비건 감자라면으로 간단히 요기했다. 자연암벽 클라이밍을 가면 같이 온 사람들과 가끔 라면을 끓여 먹곤 했지만, 비건으로 모두 준비해 와서 차려 먹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분 좋았다. 찬바람은 따뜻하고 매콤한 라면에 시원한 반찬이 되어 주었고, 덕분에 음식은 금방 텅 비었다.
멀리 집을 비워두고 산책을 나왔다. 곧 해가 질 것 같아 지금 풍경을 봐 두고 싶었다. 우리 말고도 몇몇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개머리 언덕은 하릴없이 걷기 좋은 곳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풀밭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걷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가 별안간 잔디 위에 누웠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누워 바람을 즐겼다. 시원한 해풍이 우리를 요동치게 만들었지만 마음은 반대로 잔잔한 바다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자연보다 즐거운 것이 있을까. 쉬지 않고 다가오는 파도의 형태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더라. 해가 지고 있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개머리 언덕에서는 해가 지고 뜨는 것을 모두 볼 수 있다. 노을이 지고 텐드들이 밝혀졌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간단히 마실거리와 간식을 먹으며 '텐풍'을 바라봤다. 추위는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가져온 플리스와 바람막이로 충분했다. 그가 밤하늘의 별을 보자고 했다. 가방에 들어있던 작은 돗자리를 깔고 바닥에 누워 별을 봤다. 이렇게 많은 별은 살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정말 흔히 하는 표현처럼 별이 우리 쪽으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다는 말은 참이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희뿌옇게 구름 같은 라인이 드러났다. 은하수라고 했다. 내가 은하수를 보다니. 새를 보려고 가져간 쌍안경으로 하늘을 보자 까맣게 보였던 부분까지 별로 가득 들어찼다. 쌍안경으로 보면 더 많은 별이 보인다는 걸 몰랐다. 하늘은 우리 육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별들로 채워져 있었다.
헤드랜턴을 하나씩 끼고 산책을 했다. 사람들이 텐트를 치는 자리 옆쪽으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쪽으로 랜턴을 비춰보자 사슴 눈이 반짝 빛났다. 자그마한 아기 사슴과 엄마 사슴 같았다. 우리가 놀라게 한 거 같아 자리를 비켜주려 했는데 사슴이 먼저 더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굴업도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슈퍼도 없고 식당도 없지만,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건지 궁금했지만-배가 도착했을 때 당신 키만큼 쌓인 쿠팡 박스를 들고 트럭으로 돌아가는 아저씨를 보았다.- 막연히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아침이 밝았다. 잠을 설치는 그도 텐트 안에서는 어쩐 일인지 곧잘 잔다. 쌀쌀한 바깥 기온과 요동치는 텐트와는 다른 포근한 침낭 속의 그 온도차가 오히려 숙면을 돕는다. 개운한 기분으로 텐트 밖으로 나오자 노오란 아침 햇살에 개머리 언덕이 금빛이 되어 있었다.
강아지풀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다른 텐트의 사람들도 하나둘 나와 풀밭을 거닐고 있었다. 걷기 참 좋은 곳이었다. 산책만으로도 하루를 가득 채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걷기만 해도 좋았다. 걸어도 걸어도 더 걷고 싶었다.
새를 찾아보려 했는데 자그마한 바다새 하나 말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새가 많이 있지는 않았다. 사슴을 만났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해가 뜨니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해서 우리도 짐을 싸고 아래로 내려가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섬을 둘러보며 알게 된 것은, 굴업도는 사람들이 주로 머무는 개머리 언덕 외에도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바위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독특한 바위로 이루어진 해변이 사람의 흔적 하나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 여유가 된다면 굴업도 구석구석을 돌아보기를 추천한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아침의 언덕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돌아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풀밭 구석구석 놓여있는 바위들이 귀여웠다.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 너머의 해변으로 가 보기로 했다. 그곳에 코끼리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능선으로 접어들 때 만났던 해변에 도착해서 매점에 들러 커피를 한잔씩 마셨다. 커피는 형편없었지만 해변에 앉아 마시는 커피라 맛은 중요치 않더라. 즐거운 기분으로 한잔을 금방 비우고 다시 일어나 걸었다.
해변을 넘어 반대편 모래사장으로 걸었다. 이곳은 예전에는 생선배들이 와서 시장을 열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전신주들이 기우뚱하게 세워져 있다. 낡은 전신주들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이 녀석에게 가방을 맡기고 조금 더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대부분 개머리 언덕 들머리에 위치한 매점에서 휴식을 취하느라 이쪽까지 걸어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둘이서 조용히 걸었다. 보이는 건 따개비와 모래를 파고 사는 작은 게들뿐이었다. 게들이 모래를 굴려 구슬을 잔뜩 만들어놓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모래 구슬들이 바닥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밟고 지나가기 미안할 정도로 게들은 열심히 모래를 굴리고 있었다.
코끼리 바위를 보러 간 거였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는 바위를 밟아 넘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길이 사라지고 바위 절벽이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때서야 우리는 뒤돌아 나갔다. 나가는 길에 거대한 코끼리 바위를 찾았다. 이렇게 큰 바위가 왜 오는 길에는 보이지 않았던 걸까.
거대한 코끼리 하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지 물이 차오르는 자리까지 진한 색으로 선이 가 있었다. 머리에 털이 난 귀여운 코끼리.
물이 자작하게 차 있는 해변을 걷다 보면 무슨 동물인지는 몰라도 게들과 다르게 모래로 몽블랑을 만들어 놓은 동물들도 있었다. 다들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모래 밑에서 바삐 살아가고 있나 보다.
멀쩡히 가방을 지켜준 전신주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시 백팩을 둘러멨다. 이제 도시로 돌아갈 시간. 굴업도는 떠남과 동시에 다시 가고 싶은 섬이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 다음에 또 오자, 다음엔 와서 무엇을 하자, 다음엔 어디에 텐트를 치자 같은 '다음'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채우며 다시 서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