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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공 Jun 08. 2022

안개가 낮게 깔리는 돌산

군산 선유도 백패킹


오늘은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군산 선유도가 오늘의 목적지. 선유도 선유봉에 대한 정보는 찾아봐도 많이 나오지 않아 우리가 생각한 박지에 도착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일단 출발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다.


삐걱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구석구석 손때가 묻은 낡은 열차였지만 우리가 잠시 눈을 붙이고, 스치는 풍경을 감상하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며 군산에 당도하기에는 모자람 없이 아늑했다.

선유도에 가기 위해서는 용산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군산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기차가 4시간, 버스가 2시간 총 6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떠난다. 번거롭고 힘들어도 뚜벅이 여행이 좋다. 불편한 만큼 더 많은 추억을 담아 간다. 우리는 불편함이 좋다.여행은 원래 불편한 것이 아니던가. 그는 여행 중 예기치 않은 비가 쏟아지거나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맬 때에도 추억이 생겼다며 좋아한다. 덩달아 나도 고생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다 보면 저절로 이런 탄식이 입에서 터져 나온다. ‘아! 고생하고 싶다!’


바다가 없는 도시에서만 살아본 우리는 바다가 보이기만 하면 마냥 좋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99번 버스 창문을 통해 군산 바다를 처음 만났다. 시내버스에서 바다가 보이는 것이 낯설어 한참을 기웃기웃 창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버스 안의 군산 사람들은 아무 반응이 없더라. 바다가 익숙해질 정도로 바다를 접하고 살아보고 싶었다.


선유봉 등산길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봄꽃이 피어 단조로운 초록빛 숲에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고군산군도는 안개가 멋진 곳이었다. 출발 전 날씨 앱에서 안개 낀 날씨를 확인하고 뿌연 안개가 빼곡히 차서 풍경을 보지 못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더랬다. 하지만 이곳의 안개는 내가 아는 안개와 달랐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뿌려진 자그마한 섬들에 안개가 구름처럼 내려앉았다. 낮게 깔린 안개가 섬의 밑동을 가려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이게 했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은 처음 올라보았다. 등산화가 바위에 달라붙는 느낌이 즐거웠다. 비탈진 바위면을 오를 때는 겁도 났지만 걸음걸음에 집중하며 발을 내딛는 재미가 있었다. 등산화를 신고 걸을 때는 꾹 꾹 무게를 실어 밟으면 생각보다 발이 미끄럽지 않다. 바스락거리는 발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선유봉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등산이다. 굽이진 등산로를 따라 돌아설 때마다 섬과 바다와 안개를 보느라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렇게 바위들을 넘어 선유봉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박지는 정상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박지가 보이는 곳부터는 가장 경사진 곳을 지나게 된다. 손으로 바위를 짚어가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비탈지긴 하지만 짚을 곳이 있어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갈만하다 생각됐다. 박지에 도착해 잠시 풍경을 보고 바람을 쐬었다. 4월, 캠핑하기 가장 좋은 날씨였다. 반팔을 입고 바람을 맞으면 기분 좋은 시원함이 살갗에 느껴졌다. 이제 곧 더워지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박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유봉 전체에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돌산에 우리 둘만 남았다. 우리는 천천히 집을 지었다.

기차에서 내릴 때부터 배가 고팠다. 새벽부터 나오느라 너무 이른 아침을 먹은 탓이다. 하지만 일단 선유봉으로 향했다. 우리의 여행에서 식사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비화식으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대충 끼니를 때운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식사를 한다. 또는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띈, 채식이 가능할 법한 로컬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우리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쉽게 대답하긴 어렵지만 일단 거한 식사는 그 목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마다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오히려 평소에는 매 끼니 고민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일상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백패킹에서 식사는 부수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다 보면 그렇게 되더라. 첫째로 쓰레기가 적어야 하며, 둘째로 배부르지 않아야 움직이기 좋고, 셋째로 음식이 무겁지 않아야 한다. 배낭여행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우리 혀의 쾌감보다 우선이다. 밥은 어차피 매일 먹으니까 말이다.


수많은 백패커들 중 오늘 이곳에서 자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 밖에 없었을까. 오는 길은 고됐지만 도착해서는 지금까지의 백패킹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이 돌산 중에 우리 둘만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산은 예약도 할 수 없고 먼저 찜할 수도 없는 것인데, 박지에 벌써 텐트가 있으면 어쩌나 오는 길에 계속 걱정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걱정을 좀 더 아껴 둘걸 그랬다. 선유봉에는 우리 둘과 새들과 염소 밖에는 없었다. 참 호사스러운 캠핑이다.


안개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람을 타고 안개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바로 앞 능선들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해가 질 때쯤에는 두터운 안갯속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텐트로 들어가 잠시 책을 보다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차가운 공기로 잠을 쫓았다. 새벽에 염소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내다보니 엄마 염소와 아기 염소가 우리 텐트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리가 염소들의 쉴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 미안했다.


챙겨온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자연에 와서도 아침의 커피는 포기할 수 없더라. 해가 뜨자마자 공기는 금세 훈기가 돌았다. 텐트를 접고 짐을 정리했다. 가방을 싸면서 어느새 이 돌산에 정이 들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갖가지 새소리가 들려와 쌍안경을 두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섬에 오면서 쌍안경을 두고 오다니. 차로 들어오는 섬이라 가볍게 생각했다. 좋은 탐조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바다 직박구리가 박지에 날아와 노래하고 박새와 멧새가 길을 안내해 주는 곳이었다. 건너편의 염소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쌍안경을 챙기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하산은 항상 금방이다. 아쉬운 하산을 마친 뒤 우리는 걷기로 했다. 우리는 잘 걷는다. 과거 이번엔 편하게 다녀오자 다짐한 여행에서도 결국 몇 시간을 걷고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오곤 했다. 걸으면서 보이는 장소들은 놀이터가 되고 추억이 된다.


지도에서 도보 1시간이 나오면 우리는 동시에 ‘걸을만하네'라고 말한다. 걷는 속도로 세상을 보는 것이 좋다. 천천히 풍경이 바뀌어가고 나의 다리는 걸음을 내딛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눈에 밟히는 것들로 작은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그래서 걷는 동안에는 이야깃거리가 동날 일이 없다. 걷는 것이 너무 좋아서 걷다가 체력이 바닥나버리곤 한다. 그래도 더 걷고 싶더라.


이번에도 멀리 보이는 탐나는 바닷길을 가보겠다고 걷고 또 걸어 어느새 2시간이 넘게 걸었다. 여행을 마치기 싫은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다. 걷고 있으면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 다시 버스 정류장이다. 버스를 타고 기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간다. 또 한동안은 선유도의 시간들을 곱씹으며 보내야겠다.


300mm - https://youtu.be/e-Wzdn-_U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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