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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기를

by 이생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세 개가 부어 있다. 그런데 몇 주 전과 차이가 있다면, 몇 번 구부리면 쉽게 그 붓기와 강직이 풀린다는 점이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예전엔 구부리려고 해도 관절의 강직 때문에 약을 먹기 전까지 억지로 접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턱관절은 한 달 이상 통증을 보이지 않고, 스테로이드제를 끊은 후 가끔 굳은살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앞발바닥의 뻐근함도 풀린 듯하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감사할 뿐이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도 손가락이 붓지 않아서 풍선에서 바람을 빼듯 손가락 스트레칭이 필요하지 않을 날이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순간은 꼭 찾아오리라 믿기에 조급하게 마음을 갖지 않기로 했다.




운동은 매일 하지 않고, 일주일에 3번 정도 러닝머신을 짧게 하고, 실내 자전거를 10분 정도 탄다. 운동을 더 하고 싶어도 아직까지는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 되어 되도록 관절 운동은 조심하고 있다. 겨울이어서 산책을 자주 하지 못하다 보니 아무래도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복식호흡을 하다 보면 마치 높은 산에 오른 듯한 해방감이 밀려와 기분이 상쾌해진다. 눈을 감고 숨을 폐로 가득히 채운 후 천천히 몰아쉬면 마음이 평안해져서 지금 이 순간이라도 산 정상에 오른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으니, 인생의 대부분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그저 타인을 위로하기 위한 형식적인 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관절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많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스트레칭도 하고 코어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도 감사하다. 이마저도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어도 내 삶에서도 충분히 힘들었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깨달을 수 있다.




퇴근하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논이나 밭이랑에는 마치 눈을 심어놓은 것처럼 눈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오늘 하루 종일 눈발이 조금씩 내렸다. 내리는 모습은 예뻤으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마에 와닿는 바람은 너무 차가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다가 가끔 찬바람에 냉찜질을 했다. 손가락도 추운지 잔뜩 몸을 웅크리는 듯했다. 그 모습이 가끔 안쓰러워 주머니에 얼른 넣어 주곤 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날을 향해 가고 있다. 퇴근 시간이면 어둑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해가 많이 길어진 듯하다. 오늘 하늘엔 어김없이 보름달이 떴고, 그 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것들이 참 많은데 잘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해진다. 우리가 태어나서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내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확연히 알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조차 나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어 우리는 몸을 두고 떠나가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은 우리가 모든 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지나친 경쟁을 유발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전에 어떻게 해야 얼마만큼 더 가질 수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 보름이면 동네 오빠, 언니들과 집 앞에 있는 논에 모여 쥐불놀이를 했다. 나는 직접 하지는 못했고 빨갛게 돌아가는 그 불빛만 바라봤다. 그것만으로도 황홀한 시간이었다. 오늘처럼 환한 달빛 아래 설렜던 어린 시절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그 풍경을 바라봤던 나의 눈빛이 감정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어린 시절엔 장난감이 없어도 세상이 온통 우리들 놀이터였다. 바쁘셨던 부모님들이 직접 놀아주지 못하셨어도 자연이 우리를 기르고 가르쳤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자연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는 지혜도 배우게 되고, 느린 시간을 통해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나와 더불어 타인을 이해하는 여유도 갖게 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가 자연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주변에 자연이 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소중함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보름달은 그저 형광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보름달에 소원을 빈다는 것은, 나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늘 나의 안녕만이 아니라 가족을 포함하여 타인의 행복까지도 빌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반성도 하고, 더불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에 선생님들과 함께 식사하러 간 백반집에서 사장님이 보름이라고 오곡밥과 다양한 나물 반찬, 그리고 시래기 된장국을 해주셨는데 정말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온기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먹어본 양미리 조림도 너무 맛있었다. 양미리 반찬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도 떠올랐다.




보름달이 구름 속에 잠시 사라졌다 나타났다. 만약 보름달이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 세상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기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서 이 세상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많은 이들에게 부디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래서 밤에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기를, 그런 시간들이 되도록 많이 찾아들기를 가슴 깊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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