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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퉁불퉁 뚝배기 Jan 06. 2021

부부의 충돌: 초등학생 딸 영어 숙제 vs 수면(건강)

실제 전투는 10분, 하지만 평화까지는 9시간 걸렸다

오랜만에 우리 부부간 충돌이 있었다. 수면 시간을 포함하면 9시간, 실제 전투는 10분. 당일과 다음날에 걸쳐서 끝났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갈등은 일단 수면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결혼 10년이 넘으면 이제 서로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화가 나서 서로 그 지점을 계속 건드리다가 결국에는 소규모 전투로 번진다.


어릴 적에는 왜 부모님들이 도돌이표로 부부싸움을 하나 했는데(몇 번 안 하신 것 같지만), 우리 부부가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나나 아내나 부모님들이 왜 그러셨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발단은 딸의 영어 학원 숙제였다. 딸은 숙제를 하루 종일 안 하고 있다가 밤 10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내하고 식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둘째를 재우고 방에서 나온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바로 언짢아졌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다음과 같이 사고를 하고 있었다: 첫째, 아이들은 일찍 자야(늦어도 9시 반) 덜 아픈데(= 예전에 아이들이 자주 아파서 아이들도 부모도 모두 고생했기 때문에) 왜 딸은 하루 종일 숙제를 안 하다가 아직도 안 자고 숙제를 하고 있는지. 둘째, 왜 바쁜다는 아내는 딸을 붙잡고 굳이 숙제를 봐줘야 하는지(= 아내가 본인의 일을 먼저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미 언짢음) 나: “왜 아직까지 OO 안 자고 있어”


(바로 기분 상함) 아내: “OO가 영어 숙제가 어렵데”


나: “그거 내일 해도 되잖아. 요새 계속 OO가 10시 넘어서 자네”


아내: “숙제 봐줄 사람이 없잖아”


아내가 딸을 자라고 방에 보내고 다시 나온다.


나: “OO 숙제 굳이 안 봐줘도 되잖아. 혼자 잘하는데. 안 그래도 당신 오늘 바빠서 집에 와서도 일하고 늦게 봐주니까 OO가 늦게 자게 되잖아”


아내: “오늘 처음으로 숙제 봐줬거든. 당신은 아까 핸드폰(= 브런치) 보고 있었잖아”


나: “안 그래도 당신 (한동안 계속 바빴다가) 앞으로도 몇 개월간 해야 할 일 많다면서 왜 OO 숙제 봐줘”


아내: “내가 OO 방학 때 읽을 책 고르고 주문하고 방학 시간표 짜고 했어(= 당신은 이런 고민도 안 했잖아)”


서로 총질을 주고받다가 아내가 곧 멈춘다. 어차피 끝나지 않는 싸움에 힘을 빼기 싫어서 그런 거 같다. 아내는 곧 안방으로 들어갔다. 난 언짢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루에 남아서 넷플릭스를 켜서 언짢음을 날려버릴 SF 공포영화 프레데터 2(1990년작)를 본다. 영화가 끝나고 안방에 들어가니 이미 아내가 잠자고 있다. 난 최대한 벽을 보고 잔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세팅한 새벽 알람에 깨지만 난 다시 바로 잠을 잔다. 한 시간 후 내 아침 알람에 둘 다 깬다.


아내는 본인이 화를 낸 것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고 사과를 한다. 그래서 나도 사과하고 제안했다. 앞으로는 내가 딸의 영어 숙제를 저녁 먹고 봐주기로 했다. 10년간 부부싸움을 돌이켜 보면 일반적으로 아내가 먼저 사과, 그다음 내가 사과하고 결국에는 내가 문제를 해결하거나 맡게 되는 흐름으로 간다.


결국 우리 부부 싸움의 원인은...


#1 아내 입장에서는 딸이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내 입장에서는 딸이 안 아프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다. 이 지점에서 우리 부부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보통 내용의 변주는 있지만 비슷하게 아이들과 관련된 이유로 싸움이 시작된다.


#2 아내 입장에서는 본인이 일도 더 많이 하면서 아이들 책 고르기, 교육을 다 챙기고 아이들이 늦게 잘 지언정 아이들의 진행과정을 파악하길 원한다. 내 입장에서는 아내가 나보다 일적으로도 더 바쁘니(10년간 축적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아이들의 필요한 부분을 최소한으로 챙길 테니 아내가 본인 일에 집중하길 원한다. 보통 내용에 변주는 있지만 비슷하게 아내의 일에 대한 나의 배려(라고 난 생각한다)와 관련된 이유로 싸움이 시작된다.


요약하면, 아내의 팽창정책과 나의 쇄국정책의 충돌이다. 부딪히면 결과는 나와있다. 전투는 내가 이길지언정 전쟁은 내가 지게 되어있다.


어차피 내가 질 전쟁이라면 충돌을 줄여야 하고, 그러려면 아내에게 첫마디부터 곱게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이게 쉬었으면 이미 난 부부 상담하는 유명한 상담가가 되었을지도.


다음 10년 후에는 부부가 최종적, 불가역적의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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