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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퉁불퉁 뚝배기 Apr 28. 2021

아내의 시점에서 글을 쓰다 - 남편의 뇌구조

남편이 왜 전기차 영상만 보는지 원인을 알게 된 아내

이 글은 아내의 시점으로 작성해봤습니다.


명탐정 셜록 홈스 시리즈의 작가 코난 도일의 대부분의 소설의 시점은 셜록 홈스의 인도에서 군 복무한 따뜻한 남자이자 조수인 존 왓슨으로 설정했지만 몇 편은 똑똑하면서 차가운 런던 남자 셜록 홈스의 시점에서 썼었습니다. 후자의 시점은 생각보다는 재미는 없지만...


10년간의 부부생활을 해보니 아내의 뇌 구조의 98프로를 알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2프로는 평생 모르겠죠...


아래 내용은 아내와의 대화와 행동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98프로 정확하다고 봅니다.




내 남편은 한시도 핸드폰에서 손을 때 놓지 않고 있다. 내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면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 항상 무언가를 보고 있다. 팔자 좋구먼... 무슨 보고서 언제까지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인상을 쓰고 집중해서 보는 걸 보니 야동은 아닌 거 같고... 가끔 작은 눈이 커지지만 그래 봐야 내 눈 크기의 반밖에 안된다.


고생한 아내를 위해 따뜻한 한마디를 기대했건만... 역시나...


“음... 왔어?”


건조한 물음. 그다음 예상 질문이 나온다.


“오늘은... 5프로 했어?”


매일마다 남편은 내 (욕심으로 넙죽넙죽 받아서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들에 대한 당일 완성도를 예상한다. 얄밉게도 잘 맞춘다. 결혼 생활 10년이 지나서 인지 더 예리해졌다. 아니, 요새는 일부로 좀 더 후하게 쳐준다고 해야 할까. 사실 오늘은 딴짓하느라 5프로도 못했다.


난 대답한다. “응”


나도 뻔뻔해졌다. 내 눈이 커서 내가 거짓말할 때 눈동자가 움직이는걸 남편이 귀신같이 포착하는데 이제 나는 동공의 움직임을 최소한 할 수 있으니...




유튜브 프리미엄이 우리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남편이 유튜브에서 무엇을 보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몇 년간 남편은 가입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얼마 전 유튜브 프리미엄을 구독한 후 특정 영상들만 본다.


남편은 요새 전기차 관련 영상과 철 지난 뮤직비디오만 본다. 후자는 30대 이후에는 20대 시절 음악만 듣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그렇다 치고, 전기차 관련 영상은 지나치게 많이 본다.


물론 내가 결혼 초기부터 전기차에 대해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했지만 최근 갑자기 전기차빠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테슬라나 전기차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남편이 최근에는 나보다 더 전기차에 대해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해준다.


지붕을 틴팅해야 하냐 마냐, 테슬라 모델 Y를 실은 자동차 전용 배가 평택항에 그저께 들어왔다, 직접 번호판을 신청하면 5만원을 아낄 수 있다는 둥, 나의 뇌가 소화하기에 너무 많은 내용을 알려준다. 아니, 난 사실 이런 거에 큰 관심은 없다. 그래도 신나 보이는 남편에게 리액션은 해줘야 하니 눈을 크게 떠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오히려 난 차값이 비싼데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 든다. 남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소나타 (애칭 ‘나타’)가 교체될 운명을 들을까 봐 차 안에서는 모델 Y에 대한 이야기를 못하게 한다. 그리고 소나타의 운명은 정해졌다. 먼 친척분이 시골에서 사용하실거라고  한다. 도시에서만 생활하던 나타에게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생각하면 짠하다...


하지만 남편은 개의치 않는다. 그저 빨리 나타를 넘기고 빨리 파랭이를 인도받기를 원하는 듯하다.




그래서 오늘도 할 일은 많은데, 당근 마켓과 카톡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번뜩였다. 남편이 전기차에 극도의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전기차 자체를 원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은 심취할 대상을 찾고 꽂힌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갑자기 든다.


돌이켜보니 남편은 결혼 전부터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에 푹 빠져서 10년간 매일마다 캐릭터와 스토리 분석을 하느라 핸드폰을 매일 봤다. 그리고 히어로물에 관심 없는 나를 영화관에 데리고 가기 위해 캐릭터간 관계를 설명한 내용을 담아서 한 페이지 출력해서 비말이 튀면서 설명한 게 기억이 난다. 난 당연히 10프로도 기억을 못하지만.


하지만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끝나고 남편은 히어로물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한다. 10년간의 대서사의 여정이 끝나서 그런지 더 이상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한테 원더우먼 2를 보자고 하지도 않았다. 예전의 남편이라면 밤이라도 혼자 나가서 내가 질색하는 좀비물, 관심 없는 히어로물(단, 근육남 토르는 챙겨본다)을 피곤해도 보러 간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안 한다. 코로나19로 극장이 안전하지 않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관을 거의 안 간다. 흥미를 잃은거다.


하지만 최근 몇 개월간 남편의 뇌의 90프로가 새로 꽂힌 게 전기차이다. 어벤저스가 완료되고 나서는 새로게 꽂힐 대상을 찾은 것이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보니 남편은 여전히 드러누워 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건다.


“내가 알았어. 왜 여보가 요새 모델 Y 이야기만 하는지. 어벤저스에 빠진 것과 같은 거지? 그때랑 똑같아.”


의외로 남편은 3초간 조용히 있다가 대답한다.


“음... 딱히 부정은 안 하겠어. 근데 영화와는 다르게 7000만원(차값) 취미에 빠지기에는 너무 비싸지 않을까?”


나의 팩폭이 맞았다! 난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남편은 한 마디 덧붙힌다: “어쩌면 내가 여행 돌아다니는 것보다 여행 계획 짤 때 더 희열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겠지. Its the journey itself, not the end.”


남편은 어디서 들어본 내용을 섞은 거 같다. 아마도 미국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의 “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을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남편은 뇌의 90프로가 항상 어디에 꽂혀야 기쁜 것 같다. 적어도 뇌가 과거 회사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괴로워하는 것보단 나아 보인다. 요새는 스트레스를 덜 받고 (아직까지는) 잘 다니는 것 같다.


어차피 지를 거 잘 지른 거 같다. 결국 내가 더 운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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