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난 이제 먹고 싶은걸 바로 먹는다
얼마 전 장모님 댁에 가서 갈치를 먹다 과거 생각이 다시 났다. 몇 년 전 일이었다. 애들이 어릴 때 (아직도 어리지만) 장모님 댁에 일요일 저녁을 동냥하러 갔었다. 조카들도 옆에 살아서 애들끼리 놀면 시간도 잘 가고.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데 주말에 소모된 에너지를 더 소진하지 않아도 되고. 일타쌍피다.
그날 저녁은 특별히 어디서 올라온 도톰한 황금 갈치가 나왔다. 생선구이에 자신이 있으신 장모님이 평소보다도 더 갈치를 잘 구우신 것 같다. 슬램덩크 정대만이 산왕과의 경기 초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3점 슛을 3연속 넣었듯이, 갈치의 크기. 생선용 프라이팬으로 구워진 상태. 그리고 적절한 구이 시간. 완벽한 갈치의 탄생이다.
다른 반찬도 많았지만 난 그날 유독 갈치에 눈이 갔다. 하지만 내 왼쪽엔 가족한텐 과묵하시지만 친구분들한텐 과묵하지 않으신 장인 어르신이 묵묵히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아직도 엄연한 유교사회이니 감히 내가 먼저 젓가락으로 퍼펙트한 갈치를 건드릴 수 없으니, 장인 어르신을 갈치를 집게끔 유도하자고 생각을 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저... 아버지, 갈치 드셔 보세요.” 하지만 장인 어르신은 여전히 묵묵히 다른 반찬을 드시고 계셨다. 잘 못 들으셨나 보다. 한번 더 심호흡을 하고 난 용기를 내서 좀 더 큰 카카오 미니 스피커 볼륨 4의 목소리로 “아버지, 갈치 식기 전에 한번 드셔 보세요” (....) 하지만 이번에도 묵묵부답.
이제 난 밥을 반 이상 먹어가고 있었다. 일단 급한 불을 꺼야 하니(내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니) 예나 지금이나 기억도 나지 않는 다른 반찬들을 일단 먹었다. 그러면서 내 왼쪽 눈은 계속 장인 어르신 젓가락을 추적하고 있었다. 식사 완료까지 25프로.... 식사 완료까지 10 프로 남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소프트웨어 설치(식사) 완료 바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황금 갈치는 식어갔다. 결국 난 못 먹고 집에 돌아왔다.
후유증은 컸다. 난 밥을 먹을 때마다 못 먹은 황금 갈치가 계속 생각이 났다. 심지어 잠들기 전에 아내한테 수차례 말했다. “아... 아직도 눈앞에 (갈치가) 어른거려...” 보다 못한 아내는 집에서 갈치를 구워서 줬지만 그 먹어보지 못한 환상의 갈치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갈치가 나오는 꿈도 꿨던것 같다.
그 이후 장모님이 구워주신 갈치를 먹어봤지만 그 황금 갈치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 갈치는 신의 영역이라 넘사벽이 되었고 무슨 갈치를 먹어도 그 먹어보지 못한 맛을 재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스스로 그 갈치를 완벽하다고 설정 해놓고 이후 한동안 모든 갈치를 그 갈치에 비교했었다.
갈치 사건 이후 아내는 나한테 “우리 집에서는 먹고 싶은 사람이 많이 먹어야 해”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원하는 걸 바로 흡입한다.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기회가 왔을 때 반드시 잡아야 한다. 못 먹은 갈치를 통해 배운 나의 작은 인생 교훈이다.
p.s. 확인해보니 우리 애들과 조카들이 그 갈치를 먹었다고 한다
장모님의 명언 글:
https://brunch.co.kr/@jitae202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