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퉁불퉁 뚝배기 Sep 26. 2020

난 명절 때만 스팸을 먹을 수 있다

단, 김밥 먹을 경우에는 스팸을 먹을 수 있다

다시 명절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겐 다시 “그걸” 먹을 기회가 돌아왔다.


나는 평상시에는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데 일 년에 내가 딱 두 번 부러워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명절에 스팸 선물세트를 들고 다니는 분들이다. 내가 출퇴근할 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니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난 속으로 “아 스팸을 잘라서 프라이팬에 구워서 쌀밥이랑 먹으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스팸 선물 세트를 볼 때 나는 파블로프의 개와 비슷한 반응을 한다.


사실 결혼 전에는 이렇진 않았다. 어릴 적 그리고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 때까지 아버지도 스팸을 좋아하셔서 라면에 스팸을 넣어서 드실 때 나도 그렇게 라면을 먹었고, 어머니가 계란 코팅된 스팸을 반찬으로 내놓은걸 먹고살다 보니 나한테 스팸은 친숙한 음식이다. 물론 어머니가 쌀밥이 아닌 잡곡밥을 주셨기 때문에 난 스팸의 본연의 맛을 제대로 못 느끼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하지만 고구마, 요구르트, 생선을 좋아하는 아내랑 살면서 내 인생은 18,000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감자, 초콜릿, 돼지고기파. 심지어 아내 가족 중에는 식품영양학과를 전공한 분이 계셔서 아내에게 건강식 식생활 관련 조언을 종종 해주니 나에게 있어서 집에서 스팸을 먹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갔다. 그리고 밖에서 점심때 스팸이 들어간 김밥을 주문해서 먹는 경우, 스팸이 아닌 다른 회사의 유사 제품의 햄이 들어가니 스팸 그 맛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스팸을 먹을 일이 점차 없어지고 스팸 맛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젊은 한 분이 스팸 선물 세트를 들고 지하철을 타는 것을 목격했다. 난 계속해서 흘끔흘끔 선물 세트를 쳐다보다가 아이디어가 번뜩 생각났다. 내가 스팸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면 내가 스스로 하나 산다! 역에서 서둘러 내려서 나는 집 앞 마트에 들어가서 오리지널 스팸을 고르려다가... 스팸 라이트를 집었다. 그것도 제일 작은 사이즈로. 25프로 저염 스팸이면서 작은 걸 사 가지고 가면 난 적어도 아내한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쩝... 스팸은 비싸다

스팸을 고이 가지고 가서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하철에서 스팸 선물을 가지고 다닌 사람을 봤고, 그걸 보니까 스팸을 사 먹고 싶지만 염분이 적고 작은 사이즈를 샀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심지어 명절 때만 먹으면 되지 않겠냐고 스스로 내가 앞으로 먹을 스팸 횟수를 줄였다(생각해보면 내가 협상을 지지리도 못했다... 한 달에 한 번도 아니고 일 년에 두 번만 먹겠다고 했으니).


어쨌든 승인은 받았다. 그리고 그날 쌀밥에 스팸을 먹었다. 내 몸속에 비활성화된 스팸 세포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후아...


미국에 있을 때는 한국 명절이 오면 스팸을 하나 골라와서 먹었다. 천조국답게 스팸 종류도 많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식당이 닫고 갈 때가 없으니 공원에서 점심을 때우기에는 김밥이 적당하다. 아내가 김밥 재료를 준비할 때 나는 스팸 꽁다리를 먹을 기회가 있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내 자녀들도 내 식성을 닮아서 셋이 스팸 꽁다리를 노린다는 점. 그래서 내가 미리 선수 친다. 자녀들이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 내가 미리 순삭. 그리고 스스로 정당화한다. 몸에 안 좋은 스팸을 한참 건강하게 커야 할 애들을 대신해서 늙은 내가 먹어야 된다고.


다음 주 수요일부터 추석 시작이다. 일 년에 두 번 나한테 주어진 기회. 스팸 한 캔 미리 사놔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만두에 대한 글:

https://brunch.co.kr/@jitae2020/76

못 먹은 갈치가 제일 맛있다에 대한 글:

https://brunch.co.kr/@jitae2020/6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