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에 근무하면서 결혼을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준비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나는 생각보다 수월했습니다. 왜냐하면 줄일 수 있는 건 줄여 최대한 간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내가 사용하던 것 중에 쓸만한 건 모두 남겼고, 네 번째 손가락에 알 없는 동그란 금반지 하나씩 했습니다. 큰맘 먹고 장만한 건 그와 나의 정장과 등산복이었습니다. 계속 입을 것이니 이왕이면 좋은 걸로 골랐습니다.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어려울 것도 없었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즈음 정부에서 불임 부부를 위한 지원을 한다는 뉴스를 보고 아이만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피임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임신이야 말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언제 띵동! 하며 아이가 우리를 찾을지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곧 임신을 했거든요. 양가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초음파로 만나는 아기는 날개 달린 천사와 같았습니다. 아기 덕분에 모든 것이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배가 불러올수록 일이 벅찰 때도 있었지만 가끔 힘들었고 자주 행복했습니다.
임신 7개월 무렵 눈에 띄게 몸이 무거워졌고, 연초라 업무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였고, 5시간 거리의 시댁에 자주 가는 일정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들었나 봅니다. 어느 날 피가 비치고 결국 자궁수축 억제제를 맞으며 하루아침에 병원에 누운 신세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초음파로 태아를 살폈는데 하루는 의사가 얼굴이 하얘지더니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그리곤 저더러 남편이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집에 라면 먹으러 갔다고 했더니 얼른 오라고 하라면서 전화를 주었습니다.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인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수간호사가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며 손을 잡아 준 것만 기억납니다. 30주에 출산한 아이는 인큐베이터로 나는 입원실로 보내졌습니다. 회상만으로도 먹먹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복지관에서는 진즉에 나의 출산휴가가 개시되었었나 봅니다. 남산만 한 배를 부여잡고 퇴근한 직원이 다음 날 복지관이 아닌 병원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처리했던 것 같습니다. 서운한 마음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정상적인 출산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으니 출산 휴가 다운 나날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3개월의 출산 휴가가 끝나갈 무렵 나의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곧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휴가가 끝났거든요.
출근하면서 친정에 들러 아기를 내려놓았고, 친정으로 퇴근하여 아기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왔습니다. 그나마 한 달의 반만 그렇게 했고, 반은 병원에 있었습니다. 아기가 계속 아팠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출산휴가를 마치고 출근했는데 상황이 너무 어려웠으므로 육아휴직을 쓰기로 했습니다.
복지관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아직 아무도 육아휴직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처음이 되겠노라고 선언한 뒤 육아휴직에 들어갔습니다. 복지관에서도 떨떠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저는 저대로, 복지관은 복지관대로 방법을 찾았습니다. 대신 1년은 너무 길다 하여 우선 6개월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6개월 동안 아이를 들춰 업고 응급실에 간 날이 허다했습니다. 응급실에 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입원실에서 보름을 보냈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벌써 육아휴직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 휴직 6개월, 중간에 출근한 한 달을 합쳐 10개월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퇴사하기로 했습니다.
팀장님은 조금 더 버텨보자고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버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나의 몸과 마음은 멀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아픈 아기가 먼저라는 생각만은 부여잡고 있었던 덕분으로 퇴사 후 아기도 점점 건강해졌고 나도 많이 회복하였습니다.
그 후 복지관과 유관기관에서 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고사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업무 형태로는 아기와 행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일할 수 있는 곳이 복지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 시간 강사라는 직업이 나의 천직인 것 마냥 즐거웠습니다. 물론 강의 준비가 고되고 학기 말에 있는 강의 평가가 강사의 목숨줄을 쥐락펴락하는 위기감도 있었지만 세상에 좋기만 한 직업이 어디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출산휴가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사용한 육아휴직으로 인해 직장에서 미운털이 박혔을지언정 새로운 기회를 만나 다른 모습의 사회복지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 사회복지사 말입니다. 트랜스포머처럼 변신했고,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긍정적 변화는 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지관도 그랬나 봅니다. 나보다 조금 늦게 결혼하고 그 뒤로 출산한 A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A : 경혜쌤~ 고마워요.
나 : 뭐가?
A : 선생님 덕분에 나도 육아휴직했어요.
나 : 정말? 괜찮았어요?
A : 선생님이 길을 닦아 놓았으니까 할 수 있었죠.
나 : 얼마나? 나는 6개월 이상은 안 된다고 했었는데.
A : 1년이요. 호호호.
나 : 어머나 정말 잘 되었다.
대체근무자도 있다면서 복지관이 달라졌음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는 생각도 역시 했습니다. 저는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더 나아졌으니까요. 나도 복지관도 이렇게 나아지며 발맞추어 가다 보면 정말 멋있는 사회복지사와 훌륭한 직장으로서의 복지관이 될 수 있으리라 오늘도 믿어 봅니다.
'두 배로 사'라는 제목은 저의 딸아이가 의사, 변호사, 판사가 좋은 직업이라면 사회복지사는 '사'가 두 번이나 들어가므로 두 배는 더 좋은 직업이라고 하면서 사회복지사 엄마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