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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 Feb 23. 2022

나의 오래된 렌즈를 소개합니다.

그 이름, 오해의 렌즈.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알았다. 자존감이 계속 낮은 것도 어쩌면 큰 죄 중에 하나일지 모른다고. 


외부 내게 유입된 여러 말들은 내 낮은 자존감 필터를 거쳐 여러 번 굴절되었고 그 상태로 내 안에서 아주 오래 살아다. 그렇다. 나는 한마디로 꼬아서 듣고 오래 기억하는 일을 참 잘한다. 채워' 할' 무언가오래 부재할 때 채워'지는' 죄의 잔처럼, 그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의 낮은 자존감이 더욱 공고히 되는 일은.


사실 나는 언젠가부터 모든 게 허상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끝없이 오해하는 것. 마주보며 열심히 무언가를 그려왔는데 나의 캔버스를 그 무언가와 나란히 놓았을 때 전혀 다른 것이었던 것 깨달았을 때의 허무함.  허무함이 이십 대 중반부터 내 인생에 역병처럼 돌았다. 모든 생각들이 잠식됐을 즈음 내린 결론은, '도대체 왜 더 살아야 하는 것일까.'였다. 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탱하고 있던 내 든 삶의 의미들은 그렇게 무기력해지고 무너져갔다.


 어느 날, 과거에 들었던 기분 나빴던 말들을 n번째 곱씹던 중, 나는 어쩌면 지나친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 걸 깨달았다. 사실은 너무 많은 걸 좋아하고 기대하고 바란 만큼 더욱더 열심히 곡해하고, 곡해가 만들어내는 무한대의 상처세포분열 속에서 없이 외로워졌던 것이다.


그런 내가 작년 말부터 자가 인지행동치료마냥 하고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원래는 '응 오해 아니고 사실 맞음. 땅땅땅! 내 인생에서 다 꺼져 버려!' 했던 모든 일들을, 최대한 '오해 아니고 사실일 수도 있긴 한데.. 잠깐만 보류! 너 딱 기다려!' 하는 것이다. 물론 가 내린 판단이 맞을 수도 있다. 또 맞지 않은 판단일지라도 때로는 나를 보호해 줄 때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 판단이 항상 맞을 것이라는 오만함 좀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일상 속 일련의 사건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일단 모든 걸 최대한 단순화시켜 놓고, 판단을 내릴 직접 증거들을 차분히 수집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행동은 생각보다 매우 효과적이었계속 효과적인 상태이다. 빠른 실망을 줄여나가니 인생에 대한 시니컬함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매 순간에 부지런히 구멍을 내고 땅굴을 파서 남들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키워내다 감당할 수 없게 커져버린 공허함이 참으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는 누구보다 빨리 죽음을 원했다. 그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요절이겠지만 내 속에서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내 속에서 나는 너무 오래 살았으니까. 그런데 오해만 덜 해도, 불필요하게 깊은 생각만 덜 해도, 사실 난 내 속에서 더 적게 살 수 있는 거였다. 요즘 그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가고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가듯.


나는 사람도 좋고, 사랑도 너무 좋다. 사실은 그렇다. 그리고 그 둘과 관련해 깊은 모든 것들은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모든 게 그렇듯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제 다 필요 없고 내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건강함 말이다. 더 깊어지지 않아도 좋으니, 더 살고 싶어졌으면 좋겠다.


누가 그랬던가. 나이가 들면 조금 느긋해진다고. 사실 이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지만. 모든 것을 성급하게 결론짓고 정리 버리기 전에 조금 더 기다릴 줄 알게 된 점은 나이듦이 만들어낸 느긋함이 맞다. 이런 글을 썼어도 내 남은 인생도 어쩌면 열심히 오해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저 덜 오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에 불과할지라도 내 자존감 주식은 내가 잘 챙겨야겠다는 이다. 나만큼 모자라고 나만큼 불안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사랑들 다시 꽃피울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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