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건 나는 여러모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이 영화를 보기에 최적인 상태를 알고 미리 준비해 놓기라도 한 것마냥,나는 철저히 박살나 있었다. 포기할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뭐든지 다 포기하고 싶었고, 세상 저편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매일밤, 매일아침마다 너무 불안해서 죽을 것만 같은 공황을 느꼈다. 내 영혼이 박살나서 주변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영화를 보러 갔지만 초반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고, 내 머릿속 보다 더 혼란스러운 영화 내용 때문에 뇌에 과부하가 왔다. 나는 몸을 반쯤 휘어놓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간신히 버티며 앉아있었다. 그냥 영화관을 나가버릴까 이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다.
그러다 주인공 '에블린'과 '조부투파키'의 첫 만남 장면에서부터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영화관 밖에 있는 내 모든 현실이 전부 멀어지더니 이 세상에 나랑 이 영화만 남는 환상을 체험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말 많이 울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차원의 공감과 위로를 건네받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조부투파키가 에블린에게 베이글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모든 것이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도 사라지잖아."라고 말했던 장면과 이후 에블린이 청소도구함 같은 곳에서 '조이'에게 "네 안에 어떤 게 있는지 알아. 너를 슬프게 하는 것들,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말했던 장면에서였다. 조부투파키의 말이 내 말 같았고, 에블린의 말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누군가가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마치 연극치료를 받은 느낌이었다.
-2차 관람-
나는 어딘가 찾아갈 곳이 필요했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어딘가 찾아갈 곳이 필요했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나는 사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 하는 것들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가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나.'라는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저 내가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만나고 싶었고, 이 영화를 보러 찾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정신 상태가 1차 관람 때보다 훨씬 나은 상태이었기 때문일까. 2차 관람 때는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눈에 들어왔고, 체감 상영 시간도 훨씬 더 짧았으며, 영화를 가장 풍부하게 감상했다.
-3차 관람(with. 엄마)-
이 영화는 둘이 보단 혼자 봐야 제맛
내 기준에서이 영화가 희대의 걸작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동시에우리 엄마는 절대 돈 주고 안 볼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기준에서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한 번도 안 보는 건 크나큰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몰랐었고 엄마는 알았던 '양자경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고 신나게 영업하며 호기롭게 엄마를 영화관에 데려갔더랬다.그 결과는 어땠을까. 엄마는 영화 시작 전부터 팝콘을 열심히 드시더니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꿀잠에 들어가셨다..ㅎ
분명 엄마가 영화 내용을 이해 못 하고 머리만 아파할 것 같다는 노파심에, 사전에 '멀티버스'와 '버스 점프' 등의 개념에 대해 예시를 들어 열심히 설명했었더랬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엄마랑 같이 본 걸 후회하지는않지만, 이 영화는 둘보단 혼자 봐야 제맛이라는 확신이 들기는 했다ㅋㅋ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에에올 확장판이 23일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기사로 접하고는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혼자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왜 돈 주고 보냐고 투덜거리던 엄마는 나중에 이 영화가 '모녀가 함께 보면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고는 급만족스러워하셨다는 게 후문이다ㅋㅋㅋㅋㅋㅋ
-4차 관람-
1~4차 관람 내내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질리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양자경 님의 연기였다.
한 주 내내 영화 볼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는 게 있다는 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새삼 느끼면서. 영화를 보기 전에 주위를 한번 죽 둘러봤는데 놀랍게도 관람객 전부 여성이었다. 게다가 한 모녀를 제외하고는 전부 혼자 영화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이전에 3번이나 봐서 그런가. 이제는 자막을 안 보고도 대사를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자막보다는 캐릭터의 표정과 눈빛을 유심히 봤다. 그러다가도 정말 좋아하는 대사가 나오면 다시 한번 곱씹고 또 곱씹었다.
4차 관람 내내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질리지 않은 게 있다면, 바로 양자경 님의 연기였다. 순간순간을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의 힘이 정말 셌다. 정말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느낌. 한 인간의 희로애락을 함께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국세청에서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자신의 인생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을 때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눈빛과 그것을 다 보고 나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어딘가 황홀해하는 눈빛, 멀티버스 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의 힘을 빌려와 발휘했을 때희열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과 움직임, 모든 것을 다 겪고 다 느낀 후에 찾아온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냉소가 담긴 눈빛과 손짓과 몸짓, 베이글 블랙홀 앞에서 조부투파키를 상대할 때 공격이나 방어 자세가 아닌 조이를 향해 자신의 품을 여는 몸짓 등.
도저히 양자경이 아닌 '에블린'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연기였다. 그 어떤 멀티버스의 양자경으로도 대체 불가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에에올 확장판 제목이 왜 <양자경의 더 모든 날 모든 순간>일 수밖에 없는지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