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룰브레이커 |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에 다녀온 뒤 (2)
지난 주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전시회를 보고 단지 어떤 뭉뚱그려진 감상만을 뒤로 한 채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 날, 집에 돌아와 우연히 집어든 책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내고, 그런 행복이 삶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그러나 풍요롭기 위해서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고 얼마만큼 감상할 수 있느냐에 따라 풍요와 빈곤이 나뉩니다. 그러니까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지요." _ <책은 도끼다> 중에서
유럽 여행에서 느꼈던 빈약한 나의 감상력을 이번에 피카소 박물관에 다녀오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피카소 박물관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원 그림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프랑스 여행에서 오르세 미술관은 갔지만, 현대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퐁피두센터는 가지 않았다. 짧은 일정에서 한 곳을 선택한다면 왠지 아주 고전적인 작품들을 봐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카소 박물관은 마레 쇼핑 지구로 가는 길에 기념품샵만 들렀다. 프랑스에서도 보지 못한 피카소의 작품을 한국에서 보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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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보다 먼저 이 전시회에 다녀온 친구가 [생각보다 감상하기 어렵더라, 얘]라고 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난 그래도 기대가 컸다. 유럽여행에 다녀온 뒤로 미술사와 관련된 책을 조금 들춰보기는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림 앞에서 이런 저런 고급지고 철학적인 감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훨씬 난해했다. 첫 방에서 뒷 방으로 갈수록 그림의 의미는 물론 무엇을 그린 건지 더더욱 어려워졌다.
처음엔 그래도 건물이고, 사람이고, 이건 고양이구나 하고 인지할 수 있었으나, 최신 현대미술로 올 수록 뭘 그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애써 대상을 연상해보려 노력하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해 봤는데, 반전이 있었다.
사실 작가는 어떤 '대상'을 그린 것도 아니고, 어떤 '의도'를 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feat.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청개구리 심보
현대미술하면 난 추상화가 먼저 떠오른다. 고전적인 작품들을 전시한 오르세 미술관 같은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 직관적으로 무엇을 그렸고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 알 수 있지만, 현대미술관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그림만으로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에는 난해한 면이 있다.
궁금했다. 왜 작품들이 점점 형태가 사라지고 난해해졌을까?
한마디로 전통을 거부하고자 한 예술가들의 의지가 예술을 지금의 형태로까지 발전시켰다. 전통을 거부함은 달리 말해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혁신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지만, 예술가들이 유독 굳어진 과거를 거부하는 성향이 강한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욕망이기 때문일 테다.
아름다운 것만 그릴래 vs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19세기 이전의 미술은 낭만주의로 대표되는데, 한마디로 '귀족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적이고 예술적으로 모든 장면을 미화해서 그렸달까. 귀족이나 왕가에 선물을 주기 위한 그림으로 상대의 초상화를 미화해서 그리거나 신화적인 장면에 왕을 주인공으로 그려넣어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마치 귀족을 영화 주인공처럼 만들어주며 그림을 통해 아부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지위를 드러내주기도 한 것이다.
그러던 중 1848년, <프랑스 2월 시민 혁명>이 발발한다. [귀족과 부루주아 너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야!] 하며 시민이 반기를 든 것이다. 이런 시대적 혼란 속에서 미술계의 판도도 변한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의 등장>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린 것이다.
아래의 그림 중 어느 것이 낭만주의 시대의 그림이고, 어느 쪽이 사실주의로 보이는지 살펴보시라.
그렇다. 오른쪽이 사실주의 그림이다. 무엇을 그렸냐 하면, 그냥 동네 지나가던 길에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을 그린 것이다.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 _구스타브 쿠르베
이들은 추악한 현실이나 사소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부루주아와 귀족을 위한 전통적인 미술을 거부한 것이다.
이후 20세기로 들어서며 세상은 더욱 다양해졌다. 철학과 과학, 문화적 다양성이 발전하며 미술계에도 또 한 번의 지각변동의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건은 바로 사진기의 발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수집가의 등장이었다.
1. 사진기가 등장하며 더 이상 똑같이 그리는 것의 의미가 사라졌다.
2. 산업혁명으로 인해 서민들의 삶의 수준이 평균적으로 풍요로워졌다. 누구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시대가 열리며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덜컹덜컹 이동해야 했던 과거 시대에 대한 동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통, 별로 따르고 싶지 않은데?]라는 분위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집가들의 등장이다. 화가들의 성공가도는 이제 살롱전 심사위원이 아니라 수집가에게 얼마나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느냐에 달리게 되었다. 미술시장에 투자자들이 몰려들며 저평가된 그림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자연스레 더 새롭고 실험적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존의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그림의 지평선을 열어나갔다.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만 그리는 게 예술이 아니라며 과거의 미술을 '망막적 미술'이라 비판했던 뒤샹은 작품의 경계는 예술가의 언어와 생각까지 포함한다며 미국으로 넘어가 현대미술을 퍼뜨리게 된다.
이런 것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어, 작가의 의도가 담긴다면 말이야.
잭슨폴록은 새로운 페인팅 기법을 창안한다. 액션 페인팅, 물감을 그냥 막 뿌리는 거다. 이게 무슨 그림이지?라는 의문을 비웃듯 그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은 미국 미술시장에서 인기를 얻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미국 미술시장이 그의 그림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그림이 가장 '그림'의 개념에 근접했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그린 그림은 사실 3차원 세상을 평면에 담으면서도 입체적으로 보이기 위해 착시현상을 만들어낸 거짓이었다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저 물감을 평면 위에 흩뿌려놓은 잭슨 폴록의 그림은 그림의 본질인 '2차원적 평면'에 가장 근접했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새로운 예술의 정의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그냥 이름 붙이기 나름인 것 같다는 비판적 생각이 여전히 한 켠에 남아있다. 그러니 여전히 수 억에 팔리는 NFT 조각이나 1억을 받고 텅 빈 캔버스를 보낸 덴마크 작가 와 같은 일이 논란이 되는 것 같다. 결국 휴지조각이라고 해도 너도 나도 사고 싶어하면 그 것은 작품이 되고 값비싸지는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가 미술시장에도 크게 작용하는 것 아닐까. )
그 외에도 입체적인 대상을 분리하여 그린 피카소, 현실을 뒤튼 그림을 그려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르네 마그리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전통을 거부하며 현대미술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부작용이 발생한다. 나와 같은 초보 관람객들이 감상하기엔 너무나 그림이 난해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자라는 상업미술, 팝아트가 등장한다.
팝아트는 현실 세계에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을 그렸다. 영화나 만화의 인기 있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참치캔을 그리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통에 대한 거부는 계속되어 새로움을 추구하는 여러 갈래의 현대미술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그들은 룰브레이커였다.
이런 청개구리 심보는 미운 7살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
인생, 짧다. 규칙 따위 다 부숴버리고, 절대 후회하지 마라. _마크 트웨인
개썅마이웨이적 태도를 고급지게 표현한 마크 트웨인.
세상의 인정과 관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걸 알면서도 왠지 전통이라 하면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은 나의 존재감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의 MZ세대처럼 말이다.
구세대와 신세대에 명확한 경계선을 나누고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동시에 이런 룰브레이커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대로 변화해 온 것 아닐까?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되돌아보니 피카소 전시회가 난해하게 느껴졌던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앤디 워홀 방에 다다라서야 어머 그림들이 참 예쁘네 했었는데, 대중들을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는 그의 의도에 내가 홀랑 넘어갔다는 사실도 참 웃겼다.
미술 전시회에 다녀와서 작품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내가 찍어온 사진을 다시 보면 그림이 새로 보인다. 아는 것이 감상의 폭을 결정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풍요로워지는 것은 비단 문화미와 예술미뿐만이 아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삶에 감동이 많아진다. 치즈를 좋아하게 된 뒤로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치즈가 든 음식이라면 반드시 치즈의 종류를 묻고 풍미를 기억하려 한다. 베이글을 사랑하게 된 후로 맛있는 잼과 버터의 조합을 발견할 때마다 매일 아침 뿌듯함과 사소한 감동을 느낀다. 즉, '아는 것'은 세상을 보는 렌즈가 더욱 선명해짐을 의미한다.
우리 인생의 시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가 빨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섯 살은 시속 5km로 걸어가고, 서른 살은 30km의 자전거로 달린다. 그리고 여든 살의 어르신은 시속 80km의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이다. 어릴 때는 학교가 아무리 따분하더라도 대부분의 체험이 새로운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이란 고갈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렇게 현대인들이 여행을 꿈꾸는 것 같다. 새로움에 대한 동경. 그러나 여행을 몇 번 떠나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실 여행을 가도 비행기를 타기 전이 가장 설레고,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여기도 다 사람사는 곳이구나'하며 금세 익숙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동일한 체험을 반복하더라도 매번 어떤 것을 느끼냐는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길을 걸어 출근을 하더라도 매일의 공기와 생각, 기분이 다를 테다. 그 안에서 찰나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