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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지롭다 Dec 02. 2023

prologue 너무나 아득해져 자신을 잃다

8년차 교사의 번아웃 탈출 상담일지

"너도 마음이 힘들 때가 있어? 어떻게 그렇게 늘 행복해 보이니?"

"너는 에너지가 참 좋아."

"선생님이랑 수업을 하면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요!"


종종 듣는 말이다. 스스로도 긍정적인 에너지, 하면 나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에 이것저것 얕고 넓게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 초등교사가 적성에 매우 잘 맞는 편이. 교직은 내게 천직이다 생각하며 어느덧 8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지난여름, 존재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했다.



서이초 신규 선생님께서 교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 사건을 접하면서, 그동안 "난 괜찮아"라며 외면해 오던 교직의 열악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가여워 울었고, 그다음에는 선생님을 괴롭게 한 이들을 향해 분노했다. 이제는 더 이상의 헛된 죽음을 막겠다고 검은 점과 같은 수십만의 선생님이 함께 모여 검은 파도를 만들었을 때에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 뒤, 이전보다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여름 내내, 잠시만 닿아도 허벅지에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아스팔트 위에 앉아 모든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동료 교사와 힘을 합쳐 근무 중인 학교의 9.4 공교육 멈춤의 날(이하 9.4)을 이루어 내면서 힘을 많이 쏟았다. 그런데 9.4를 지나면서 묘하게.. 뭐랄까 허탈감이 왔다. 마치 9.4가 우리의 종착지인 것처럼 달려오던 것 같다. 공교육이 멈추는 전무후무한 일을 이루었는데 학교 현장은 그다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았.


한 동료에게서 우리 반 학부모가 9.4 멈춤 관련하여 교문 앞에서 나를 만나려고 벼르고 있다고, 오늘은 하교지도할 때 정문까지 가지 말라는 걱정 어린 당부를 들었다. 교장은 "서이초 사건 이후로 학부모가 많이 참고 있어요. 우리가 너무 우리 입장만 내세우면 큰 일이 날 것 같아요." 따위의 말을 하며 교직원 협의를 통해 폐지한 학부모 공개 학예 발표회를 부활시켰다.


학교 현장이 학부모에게 휘둘리는 것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각이 왔다. 그동안 ‘우리가 무언가 이루어냈다’고 실체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품고 있던 환상이 박살 났다.



교직 생활 중 만난 아이들 중 가장 순수하고 사랑스럽다 생각했던 아이들이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림 같이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아이가 1학기에 전학 가면서 반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나? 아이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싸우는 것 같네. 아니, 이게 무슨 말버릇이람. 예의를 밥 말아먹었나, 수업 시간에 자기 집 안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자세가 흐트러져있네. 학부모가 남긴 이 문자 담긴 의도는 무엇이지? 스트레스가 누적되면서 만인에 대한 투쟁 모드로 변해 학생과 학부모에게 적대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열악한 교직 상황이 보도되었고, 비보도 잇달았다. 온갖 갑질 상황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왕의 DNA 사건, 카이스트 운운 학부모, 자살한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가서 진짜 죽었는지 확인한 학부모, 교사 대상 칼부림 사건, 들어간 지 2시간 만에 아동학대로 고소된 선생님, 웹툰 작가의 특수 교사 고소 사건 등.. 뉴스 탭을 열기만 하면 부정적인 소식들이 쏟아졌다.


어쩌다 내 직업이 이렇게 동정을 받을 정도로 열악한 처지가 되었지? 나름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도 하고 항상 최상위권에 있었는데, 대학 입시라는 한 순간의 선택으로 쥐꼬리 만한 월급 받으며 아동학대 고소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인가? 교직에 대한 만족감은 한순간에 증발되고 말았다.


교직은 침몰하는 배 같다. 이 배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정말로 고쳐질지는 모르겠다. 애써 희망을 가져 보려 해도, 마주하는 현실은 어두웠고, 미래는 더욱 캄캄해 보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절망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교사를 그만두면 뭘 하고 먹고살아야 하나.. 기후 위기 때문에 지구도 망할 텐데 자녀는 낳을 수 있을까? 10년 후의 교직은 어떻게 될까? 20년 후에 이 나라는 멀쩡할까?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재난이 더욱 심화되는데 이 삶에 희망이 있나? 


물음표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답이 보이는 대신 정신이 아득해졌다.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괴로우니 회피를 택했다. 퇴근하면 집안일도 내팽개치고 소파에 널브러져 몇 시간이고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었다. 실없는 개그를 하는 유튜버의 쇼츠를 섭렵하고(빵 먹다 살찐 떡,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겨우 2분 남짓한 영상을 보면서 댓글을 확인하다 스크롤을 더 내려 영상이 끝나기 전에 다른 쇼츠로 넘어가고, 완결 웹툰을 찾아 정주행 하면서 시간을 녹였다. 도파민에 절여진 채로 지내다 보면 심연의 절망감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런데 문득 내가 나를 학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괜찮은가? 지금처럼 퇴근하고 와서 소파나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하다가는 인생이 확정적으로 망할 것 같다. 뉴스를 보다가 우는 것도 그만하고 싶고, 스마트폰에 빠져 지내는 생활도 이제는 끊어내고 싶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 기복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걱정도 들었다. 만사에 긍정적이던 나는 어디로 갔지?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바닥이 닿지 않는 늪에서 탈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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