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탈출판할 수 없는 이유
이직 후 처음으로 마감을 한 날. 출판 일을 하며 처음 마감해본 것도 아닌데 유달리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의 원고가 내게 오기 전까지 세네 명의 편집자의 손을 거쳤지만, 끝끝내 온전한 책이 되지 못하고 날것의 원고로만 남아 있었다. 기획 당시보다 관련 시장이 침체되어 가던 데다가 2년 동안 작가님들(심지어 공저라는 뜻)의 원고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오래 고여버린 몇몇 윗사람들은 이걸 편집자 능력 탓하던데 절대로 편집자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알린다ㅡㅡ) 어쨌든 인수인계서를 보니 여러 가지로 대단한 부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수분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그걸 내 손으로 해결했다. 장장 7개월에 걸쳐서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챗GPT가 없었더라면 이 책은 마감까지 12개월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간 윤문의 수준을 넘어 리라이팅을 하는 일은 잦았지만, 이렇게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과장이 아니라 모든 문장을 싹 다 손봐야 했던 원고는 처음이었다. 원래 하던 분야의 도서가 아니라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글도 요소도 모두 수정하거나 삭제하거나 보완해야 했던 상태였다. 힘들어 죽겠다고 적어도 7만 번쯤 말했던 것 같다.
하기 싫은 마음의 게이지가 초중반에는 100이었다면, PC교를 마쳤을 때는 90으로 줄고, 내지 시안이 나왔을 때 80으로 내려갔다가, 조판본을 받았을 때 70이 되고, 표지를 결정했을 때 60까지 감소했다가, 초재삼교를 끝마쳤을 때 50이 되었다. 속표지와 판권과 차례 등 부속까지 앉혀서 온전한 도서의 꼴을 갖추었을 때는 40, OK교를 보며 최종 수정을 끝마쳤을 때 30, 인쇄소에서 검판용 파일을 받았을 때 20, 이상 없으니 진행해달라는 전화를 했을 때 10, 마감 완료했다는 글을 사내 툴에 업로드하니 비로소 0이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마감을 하고 나니까 뭐가 그리도 힘들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출판업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일들 중에서 특히 방송 일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나의 콘텐츠가 나오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공력이 들고, 때로는 힘들어서 욕설까지 퍼붓는다는 점에서는. 그러면서도 무사히 일을 마무리하고 결과물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는 이전까지의 고통을 싸그리 잊게 된다는 것도. 그렇게 기억이 조작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쉬운 길을 버리고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한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물만 남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사서 고생하며 자꾸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왜 출판을 택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적성에 맞아서요'라고 답하곤 했지만, 책 만드는 인간들이 제일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지겹게 많지만, 우리는 어쩌면 고작 성취감 하나 때문에 출판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만든 책을 실물로 받아보았을 때, 서점 매대에서 발견했을 때, 누군가의 서재에 꽂혀 있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의 쾌감은 심지어 질리지도 않는다.
아주 방금 '고작'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성취감이야말로 사람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힘들었던 과거를 속이고,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면, 해내지 못할 일도 얼마든 해낼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마음속에 희망을 틔우는 씨앗이 된다. 그러한 희망이 있어야만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을 기대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고작 성취감 하나 때문에 나는 '탈출판' 하지 않고 계속해서 책을 만들 생각이다. 지금까지보다 더 험악한 말을 내뱉게 만드는 원고가 저 멀리서 기세등등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다 잊어버렸으니까. 며칠 뒤면 오늘 마감한 책이 내 책상 위에 고이 놓일 테니까. 그러고 나면 또다시 전진할 힘을 얻게 되겠지. 그 힘을 원동력 삼아서 앞으로도 출판계에 남아 굳이 사서 고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