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울을 이기려 혼자 중국에 갑니다
1. 퇴사 후 마라탕 한 그릇
“… 따라서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 사업 전략에 따라 실적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마침표를 찍고 엔터키를 눌렀다.
화면이 잠깐 깜빡이더니 기사가 성공적으로 송고됐다는 팝업이 떴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다.
기자실 오른쪽 통창으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타 매체 기자들도 하나 둘 노트북을 챙겨 조용히 자리를 떴다.
방송부 기자도 퇴근했는지 오후 내내 기자실을 울리던 브리핑 소리가 멈췄다.
나도 노트북을 닫았다. 3년간 꼬박 썼던 이 아이는 주인을 잘못 만나 커버에 검은 때가 끼었다.
기자실 근처에 위치한 마라탕 가게의 문을 열었다.
주마다 한 번 꼴로 방문해 단골로 이름표를 단 곳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마라샹궈지만
오늘은 아주 매콤하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싶었다.
먼저 건두부와 넓적 당면, 목이버섯 등을 유리볼에 가득 담는다.
큼큼한 냄새가 나는 양고기도 한 덩이 넣었다. 맵기는 3단계로 맞췄다.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김이 폴폴 나는 마라탕 한 그릇이 서빙된다.
둥둥 뜬 고추기름이 새빨갰다. 한 젓가락 들었다. 역시 매웠다.
코를 찌르는 알싸한 고수 향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 번 터진 감정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김이 멈추고 그릇이 식을 때까지 소리를 삼키며 울었다.
오늘 나는 마지막 기사를 썼다.
내일부턴 리우화 기자가 아니다.
어떠한 직함도 별칭도 없이, 평범한 이름 석자로 돌아간다.
퇴사 사유는 명확했다.
작은 회사, 적은 기회, 때 맞게 쌓인 경력.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퇴사는 자연스러웠다.
사회부에서만 2년을 채운 내겐 경제지는 휴양지나 다름없었다.
현장을 바삐 다닐 필요도 정치인들을 따라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숫자만 보면 땀을 삐질이던 기자 초년병은
이젠 웬만한 경제 기사는 눈 감고도 쓸 수 있는 IT전문 기자가 됐다.
별 일 없이 이어지는 나날들, 적당히 칭찬받고 인정받는 하루들.
떠다니는 구름 위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타닥이는 키보드 소리가 좋았고 남들이 불러주는 기자님이란 호칭도 좋았다.
오롯이 내 힘으로 써 내려가 완성하는 기사들, 내 이름 석자가 박힌 기사 바이라인.
메일이나 댓글로 전해지는 독자의 반응들.
기자 이외의 삶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 아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만 하면 젊은 날의 이정표는 확고해진 셈이었다.
2. 불안이 낸 삶의 균열
내게 어떤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한낮의 잔열이 남아 있던 그 밤에도 책상에 앉아 기사 발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와인을 마셔서 감정이 예민해진 탓일까.
마지막 문장을 쓰는데 갑자기 심장이 답답해졌다.
타자기에서 손을 떼고 창문을 열어 하늘을 멍하게 쳐다보다 일순간 복받쳐 울었다.
이따금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에 홀로 울 때는 많았지만, 그날은 왜인지 기억에 남는다.
그만큼 소리 내 서럽게 울었다. 구름 위의 삶은 언제나 불안했다.
언제 비가 내릴 까, 또 번개가 칠까.
일상이 안정될수록 내 안의 우울은 나를 갉아먹으며 꾸물꾸물 성장했다.
무기력한 하루를 이겨내려 갖은 노력을 했다.
운동에 집착했고 여러 모임에 나가 없는 텐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집에 홀로 돌아와 냉기만 남은 방의 전등을 켜는 일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왜 나는 기자가 됐을까. 타인의 삶을 들어주려 기자가 되지 않았나.
내 삶도 똑바로 못 챙기면서 타인에게 마음을 열 여유가 없었다.
지나 온 삶에 마침표가 필요했다.
점이 아닌 선으로 이어지는 긴 마침표가.
그렇게 퇴사를 결정했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속여가며 너무 늦게 나의 회복을 미뤄왔다.
집으로 전달된 전자문서 형태의 사직서를 쓰면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퇴사 절차는 원활하게 진행됐다. 상사들은 잘하던 기자가 나간다고 아쉬워했다.
많은 날들에 쓰라리며 기자 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한 만큼 인정받았단 사실에 작게 기뻤다.
나를 많이 챙겨줬던 사수 선배 앞에선 주책맞게 눈물을 훔쳤다.
나의 불안을 가장 오래 곁에서 지켜봤던 선배는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
한 순간도 손에서 떼지 못했던 노트북도 깨끗이 닦아 반납했다.
퇴사하던 날은 유독 날이 맑아서 회사가 위치한 광화문 광장을 한 두 바퀴 묵묵히 걸었다.
3. 나의 버킷리스트
기자라는 일을 지속할 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걸을 지.
한참 갈림길 중턱에서 고민할 쯤
문득 책장을 뒤진 후 꼬깃꼬깃 구겨진 노랑 메모판을 꺼내 들었다.
스무 하나 무렵.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작성한 버킷리스트는 총 10가지.
시선이 오래 머무른 소원은 ’ 중국 대륙 혼자 오래 여행하기‘.
왜 중국이었을까.
중국이란 나라에 정이 든 계기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젊은 시절의 아빠는 유독 중국 출장이 잦았다.
주말이면 어린 나를 옆구리에 끼고 중국어 공부를 하시곤 했다.
그때 들은 중국어는 이상하면서도 꽤 매력적이었기에
고등학생 땐 제2 외국어로 중국어를 택했고 대학생 땐 중국어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그런 나를 기특하게 여긴 아빠는 스물한 살이 됐을 무렵
“세상을 경험해 봐라”며 상하이에 어학연수를 훌렁 보내버렸고
비단 읽고 쓰기만 가능했던 나는
생존 중국어를 매일 울고 불며 공부한 결과
반년 만에 HSK5급을 얼렁뚱땅 통과하고 1년 후엔 최고 수준인 6급을 취득했다.
그 후에도 꾸준히 중국어 공부를 이어가며
쑤저우(苏州), 항저우(杭州), 시안(西安) 등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여행 자금이 모이면 내 발길은 이상하리만큼 중국을 향했다.
한치 없이 넓은 대륙, 투박하면서도 화려한 문화, 독특하면서 인간적인 중국인들.
그 가운데 설 때면 묘한 위로를 받았다.
상하이란 낯선 환경에서 홀로 견뎌 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만큼
중국 어딜 여행하든 매번 애틋하게 와닿기 때문일까.
그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후회 없을 만큼 스며들어 보자.
어디선가 여행자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펼치고
가보지 않은 도시들에 동그라미를 쳤다.
윈난성과 쓰촨 성만 펜이 닿지 않았다. 여행지는 정해졌다.
퇴사 후 장기 여행은 분명 치기 어린 결정이었을까.
이직처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건 불확실성에 두 발로 서는 것과 같다.
이직은 어디로 할 것인 지, 공백기는 뭐라고 설명할 건지
여행에 쓴 생활 자금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이십 대 초반이야 돛단배처럼 살아도 되지만
내년 삼십을 바라보는 지금은
매 순간의 선택이 신중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다만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가 말하지 않았나.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상자를 열기 전엔 어떤 맛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 어떤 나이 든 확실치 않다면 나는 더 늦기 전에 불확실성을 선택하겠다.
여행의 끝에 무엇이 남아 있을 진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게 후회든 보람이든 상관없다.
사람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수 만 가지다. 난 나의 우울을 이겨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