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는 충분했다, 이제는 학교폭력 설계를 바꿔야 할 때
교육부가 발표한 2025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초·중·고교생의 피해 응답률은 2.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학교급별로는 초등학교 5.0%, 중학교 2.1%, 고등학교 0.7%로, 특히 초등학생의 피해율이 가장 높았다. 이는 2024년 1차 조사 대비 각각 0.8%p, 0.5%p, 0.2%p 상승한 수치다. 피해 유형으로는 언어폭력이 전체의 39.0%로 가장 많았고, 이어 집단 따돌림(16.4%), 신체폭력(14.6%), 사이버폭력(7.8%) 순이었다. 예방교육과 캠페인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수치는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가해 학생이 나쁘다”거나 “문제가 있는 학생이다”는 식의 개인 책임으로 원인을 돌린다. 그러나 이제는 그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다. 학교폭력은 한두 명의 도덕적 결핍이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만든 구조의 실패일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키워왔는가, 또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관계와 경험의 장이 되었는가. 이제는 그 본질을 물어야 한다.
과거의 가정은 넓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보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은 부부 중심의 ‘작은 섬’이 되어버렸다. 아이는 유일한 중심이고, 부모는 아이의 요구에 즉시 반응하는 해결사가 된다. 장난감, 간식, 스마트폰… 아이가 원하면 즉시 제공된다. 아이가 불편함을 느끼면 곧장 달래주고, 문제를 겪으면 부모가 먼저 나서서 해결해준다.
이런 양육은 처음엔 아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는 좌절과 충돌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쉽게 화를 내고,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타인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실제 학교에서 교우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왜 내 말을 무시하느냐", "왜 내 생각을 따라주지 않느냐"며 상대방을 비난한다. 그 밑바탕에는 '받는 게 당연하다'는 내면화된 감각이 깔려 있다.
이제는 부모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아이가 삶의 작은 실패와 불편을 겪도록 허용해야 한다. 기다림, 양보, 실패, 갈등, 실수… 이런 감정과 상황을 경험하고, 그걸 넘어서게 격려하는 것이 진짜 양육이다.
교사들은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다. 생활지도를 하다가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거나, 사소한 다툼에 개입했다가 민원에 시달리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 결과, 갈등이 생겨도 개입을 망설이고, 문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일이 커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제는 이 공백을 아이들이 먼저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누구도 말리지 않으니, 언어폭력이나 따돌림이 더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예방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즉시 개입할 수 있는 권한과 안전장치가 없다면 모든 교육은 선언에 불과하다.
교사는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한 감시자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상황을 조정해주는 ‘중재자’이자 ‘신뢰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선의를 믿고, 정당한 개입이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생활지도를 잘한 교사가 보호받는 학교, 회복적 대화가 일상인 교실. 그게 아이들이 안전하게 성장하는 기반이다.
오늘의 아이들은 ‘관객’ 앞에서 살아간다. 단체 채팅방, 짧은 영상, SNS는 관계를 무대처럼 만들고, 친구와의 갈등조차 콘텐츠로 소비된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배제하는 모습은 ‘밈’이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친구들은 방관자이자 관객이 된다.
이제는 전통적인 ‘힘의 불균형’만이 아니라 ‘주목의 불균형’이 문제다. 소외된 아이는 더 소외되고, 가해자는 더 많은 이목을 받는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더 자극적인 행동으로 서로의 관심을 끌고자 한다. 이 주목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학교폭력은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세계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확산을 막는 장치, 예컨대 따돌림 영상이나 조롱성 콘텐츠의 즉시 차단, 플랫폼과 학교 간의 연계 시스템, 신고가 아닌 회복 중심의 개입 구조 등이 필요하다. 아이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들을 둘러싼 어른들과 시스템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학교폭력 근절”이라는 구호는 이제 충분히 반복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느냐이다. 이제는 선언이 아니라 설계가 필요하다. 가정에서는 아이가 실패와 갈등을 경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정에 기여하고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학교는 교사가 갈등 상황에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감정 조절과 공감 능력을 기르는 교육을 교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야 한다. 사회는 디지털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확산을 실시간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아이들의 관계를 관전하는 ‘관객’이 아니라 개입하고 돌보는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학교폭력은 특정 학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선택과 방관이 만든 결과다. 누군가가 아닌,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진 과제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들만 바꾸기를 바라지 말고,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과 관계의 구조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설계와 실천이다.
2025.9.21.(일)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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