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하는 모호함
아늑했던 유년기. 친누나와 역할극을 하며 놀았고, 동네 형들과 곳곳을 누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도 사교성이 좋아 모두와 잘 지냈다. 받아쓰기 시험만 제외하면 참 행복한 나날이었다. 한편, 아버지 사업은 기울어갔고 결국 9살에 부산에서 김해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추억이 아련했던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동네와 친구들이 그립곤 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여전히 부산 모임에 나가신다는 걸 들었고, 부탁드려서 친구 한 명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17년 만에 상봉이 이뤄졌다. 친구는 통통했던 어릴 적과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놀랍게도 수상 종목에서 국가대표가 되어있었다.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둘 사이의 어색함을 완전히 몰아냈다.
3시간가량 흘렀고, 대부분의 이야기를 친구가 주도했다. 주로 목표의식, 겸손함, 효도에 관해 말하며 웃음기 가득했으나, 한 개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고민도 있었다. 이는 사람 관계에서 느끼는 양가감정이었는데, 특히 그로 인한 응어리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걸 어려워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혹시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 감정들이 상충할 때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면서 의문스러웠을 수 있었겠는데.."라며 내면의 감각을 건져 올리려 했다. 그러자 친구는 "어떻게 나보다 내 마음을 잘 아는 거 같냐? 혹시 간호사가 아니라 심리.. 그런 쪽 아이가?"라며 물었고,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 분야에 관심이 많은 터라 현재 정신과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답했다. 친구는 "역시~!"라고 탄성하며 추후 멘탈 관리를 위한 상담이 필요할 때, 나를 고용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게 친구와 서로를 나눈 뒤,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했다.
왜 친구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을까?
조던 피터슨에게 '혼돈을 언어로 정렬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칼 로저스에게서 이 능력이 타인을 위해 쓰일 때 치료적이라는 걸 배웠다. 어떤 면에서 치료적일까? 자신조차도 표현하지는 못했던 감정을 타인이 건져내주는 것은 공감 효과를 상당 수준까지 올려줄 수 있다. 우리는 공감받을 때 혼자가 아님을 체감하며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다.
물론 함부로 잡아채면 안 되는 감정도 있다. 이는 사실 특정한 감정보다는 시기인데, 당사자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경우를 말한다. 딱지도 덜 앉은 부위를 자꾸 긁으면 어떻게 될까? 피나고 아프다. 또 주의할 점은 애먼 곳을 긁는 경우다. 상대방의 감정 과녁을 적중시키지 못한 때를 말한다. 물론 치료자가 내담자에게 온전히 다가가지 못한 경우나 유난히 독특한 내담자를 만난 경우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려 깊은 탐험은 의미가 있으며, 진정한 소통이 전제한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그때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걸로 들리네요."
"아뇨.. 그렇진 않은데요.."
"그분에게 불만스러웠던 건가요?"
"으흠.. 어쩌면 그럴 수도요.."
"혹시 실망하셨던 건가요?"
"맞아요! 저는 그분께 실망했어요..
저는 어릴 때 이후로 그분께 실망해왔어요."
분노 (X) -> 불만 (△) -> 실망 (O)
이러한 본능적 감각은 당사자 내부에서 일렁인다. 실재하지만 모호한 의미는 옳은 표현에 의해 건드려질 때 실체를 드러낸다. 이를 위해 치료자는 자신의 판단기준을 한편에 밀어둔 채, 대상자의 사적인 인지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타인 안에 흐르는 의미의 변화에 순간순간 예민해질 수 있다.
드러내서 마주하면 대안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두운 골목길 모자 쓴 사람보다는 밝은 대낮에 용모가 훤히 드러난 사람이 위험 시 대처하기에 더 용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