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어른
"선생님 찍었는데 5개 중 4개나 맞췄어요!"
"그래? 그건 다 틀린 것보다 못한 거야"
아동센터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친 지 두 달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이들이 태블릿으로 학습하는 게 참 신기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이리저리 터치하는 게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작은 강아지가 풀밭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모습처럼 귀여웠다.
사실 이전에는 아이들과의 소통에 부담을 느꼈었다. '날 재미없어하면 어쩌지? 지금은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러나 요즘은 혼자 있다가도 문득 꼬마의 웃음소리가 귀에 맴돌고, 자그만 손가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애들은 딱히 좋아하지 않아'라고 했는데, 그건 진정한 속마음은 아닌 듯하다. 실은 다가가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안 되니까 선을 그었던 게 아닐까?
이제는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하는 게 익숙하다. 이렇게 변한 것이 참 만족스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냉정하게 대해야 할 때도 있다. 바로 학습 시에 문제를 대충 찍고 넘어갈 때다. 처음에는 관계에 금 가는 게 두려워서 녀석들이 찍고도 많이 맞췄다고 즐거워하면 '와 찍었는데 그렇게 많이 맞췄어?'라던지 '에이 그러면 안돼~'라고 유약하게 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옳지 않은 행동에 옳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고 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밀한 관계는 학습이 끝난 뒤에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그러니 옳지 못한 행동을 할 때는 이를 분명히 바로 잡아줘야 한다. '그렇게 푼 건 전혀 관심도 칭찬도 줄 수 없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걸 '행동치료'에서는 '소거'라고 한다(부적절한 행동에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그 행위를 줄임). 그 후, 성실히 학습하고 있는 다른 아이를 적절히 칭찬해주면 좋다. 무엇이 옳은 행동이고 칭찬받을 만 한지 두 눈으로 직면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 학습이 적절히 이뤄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찍는 아이들도 있다. 이때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철수가 먹은 피자를 구하라는 나눗셈 문제가 있다고 치자. 아이가 어려워한다면 문제를 읽어주고 나눗셈 공식을 적어준다. 공식을 보고도 어려워한다면 나눗셈 전에 배운 곱셈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래도 어려워한다면 구구단을 같이 외는 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 풀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춘다. 이 과정의 끝에, 아이는 드디어 자신이 수학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에 드러난 것일 뿐,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이 경험이 무의식에 뿌리내려 어려운 일이라도 세분화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면 결국 극복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비록 다음 문제에서 붕어처럼 까먹을지라도 다시 일관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주면 결국 스스로 풀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공부를 싫어하던 아이가 문제를 풀 수 있게 됨으로써 공부를 도전적인 놀이로 여기는 광경을 빈번히 목격했다.
어른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초등학생이 수학 문제에서 겪는 고통을 '실연, 취업 낙방, 사회생활' 등으로 겪고 있을 뿐이다. 즉, 문제를 회피하는 아이가 있듯 문제를 회피하는 어른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문제를 찍던 아이는 어른이 되었을 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까? 반면, 어려운 문제라도 주변에 도움을 청하며 극복해나가던 아이는? 이들은 실제로 좋은 결과를 경험하며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고난에 적절한 돌파구가 있다고 믿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이제는 늦어버린 걸까?'
회피형 어른들이 이 글을 읽으며 이미 늦어버렸다고 속상해할 수도 있겠다. 이런 식의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여전히 미숙한 반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자신을 가르쳐야 할 어린아이처럼 대하자. 쉬운 길만 택하려는 마음을 이해해주되 그보다는 옳은 길을 가도록 방향을 잡아주자.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살을 빼려면 적게 먹어야 하고, 성적을 잘 받으려면 교수자의 말을 귀담아듣고 개인 공부에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한다. 다만, 이러한 과정은 안 내킬 뿐이다. 그러나 5살짜리 아이를 제멋대로 살게끔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균형 잡힌 끼니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와 사탕, 햄버거만 먹지 않을까? 애나 어른이나 회피하고 쾌락만 좇으면 결과는 둘 다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욱 불쾌한 결말은 어른에게 발생한다.
저명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말처럼 삶은 고통이다. 그러니 '고통을 회피하겠다'는 말은 '삶을 회피하겠다'는 말이다. 회피하는 삶에서 벗어나자. 내가 나의 양육자임을 자처하고 쉽사리 뿌리 뽑히지 않을 어른으로 길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