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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완 Mar 23. 2021

뭔가 모를 그것, 건져내다.

실재하는 모호함

아늑했던 유년기. 친누나와 역할극을 하며 놀았고, 동네 형들과 곳곳을 누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도 사교성이 좋아 모두와 잘 지냈다. 받아쓰기 시험만 제외하면 참 행복한 나날이었다. 한편, 아버지 사업은 기울어갔고 결국 9살에 부산에서 김해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추억이 아련했던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동네와 친구들이 그립곤 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여전히 부산 모임에 나가신다는 걸 들었고, 부탁드려서 친구 한 명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17년 만에 상봉이 이뤄졌다. 친구는 통통했던 어릴 적과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놀랍게도 수상 종목에서 국가대표가 되어있었다. 삶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둘 사이의 어색함을 완전히 몰아냈다.



3시간가량 흘렀고, 대부분의 이야기를 친구가 주도했다. 주로 목표의식, 겸손함, 효도에 관해 말하며 웃음기 가득했으나, 한 개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고민도 있었다. 이는 사람 관계에서 느끼는 양가감정이었는데, 특히 그로 인한 응어리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걸 어려워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혹시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 감정들이 상충할 때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면서 의문스러웠을 수 있었겠는데.."라며 내면의 감각을 건져 올리려 했다. 그러자 친구는 "어떻게 나보다 내 마음을 잘 아는 거 같냐? 혹시 간호사가 아니라 심리.. 그런 쪽 아이가?"라며 물었고,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 분야에 관심이 많은 터라 현재 정신과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답했다. 친구는 "역시~!"라고 탄성하며 추후 멘탈 관리를 위한 상담이 필요할 때, 나를 고용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게 친구와 서로를 나눈 뒤,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했다.




왜 친구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을까?


조던 피터슨에게 '혼돈을 언어로 정렬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칼 로저스에게서 이 능력이 타인을 위해 쓰일 때 치료적이라는 걸 배웠다. 어떤 면에서 치료적일까? 자신조차도 표현하지는 못했던 감정을 타인이 건져내주는 것은 공감 효과를 상당 수준까지 올려줄 수 있다. 우리는 공감받을 때 혼자가 아님을 체감하며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다.



물론 함부로 잡아채면  되는 감정도 있다. 이는 사실 특정한 감정보다는 시기인데, 당사자의 마음의 준비가   경우를 말한다. 딱지도  앉은 부위를 자꾸 긁으면 어떻게 될까? 피나고 아프.  주의할 점은 애먼 곳을 긁는 경우다. 상대방의 감정 과녁을 적중시키지 못한 때를 말한다. 물론 치료자가 내담자에게 온전히 다가가지 못한 경우나 유난히 독특한 내담자를 만난 경우 발생할  있다. 그럼에도 사려 깊은 탐험은 의미가 있으며, 진정한 소통이 전제한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그때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걸로 들리네요."

"아뇨.. 그렇진 않은데요.."

"그분에게 불만스러웠던 건가요?"

"으흠.. 어쩌면 그럴 수도요.."

"혹시 실망하셨던 건가요?"

"맞아요! 저는 그분께 실망했어요..

저는 어릴 때 이후로 그분께 실망해왔어요."

분노 (X) -> 불만 (△) -> 실망 (O)



이러한 본능적 감각은 당사자 내부에서 일렁인다. 실재하지만 모호한 의미는 옳은 표현에 의해 건드려질 때 실체를 드러낸다. 이를 위해 치료자는 자신의 판단기준을 한편에 밀어둔 채, 대상자의 사적인 인지적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타인 안에 흐르는 의미의 변화에 순간순간 예민해질 수 있다.



드러내서 마주하면 대안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두운 골목길 모자 쓴 사람보다는 밝은 대낮에 용모가 훤히 드러난 사람이 위험 시 대처하기에 더 용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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