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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한수 Jan 08. 2021

내가 바둑을 30년 동안 했던 이유

지독한 외로움과의 싸움

“넌 4살 때 갑자기 말이 없어졌어”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약한 자폐증 증상이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어”

어린 시절 저는 말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동그란 물체만 보면 다가가서 하루 종일 빙글빙글 돌려대는 그런 아이였죠.


저희 부모님께서는 그런 저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많은 장소에 데려갔고, 치료를 위해 당시에 시간당 10만 원이 드는 거액의 센터를 매주 데려갔다고 합니다.


6살, 바둑을 알다


많은 경험을 시키려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영, 스케이트, 미술, 태권도, 피아노, 바둑 등을 배웠었죠.

솔직히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피아노와 바둑을 좋아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조용히 앉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편안했던 걸 수도 있겠네요.


1학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


조용하고 내성적인 저는 친구들의 놀림감이었고 늘 괴롭힘을 당했었죠.

추운 겨울, 학교에 틀어져있던 난로에 친구들은 제 점퍼를 뺏어가더니 그 위로 던져버렸습니다.

다행히 불 속에 던진 것이 아니라 철판 위에 던졌기에 점퍼가 난로에 그을렸던 것으로 끝났지만 저의 마음이 타버렸죠.

저는 친구들과 싸우는 대신 말없이 점퍼를 가져왔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친구에게 단 한마디도 못하는 그런 아이였죠.


저는 다른 모든 학원을 끊고 바둑만 했습니다.

학원 가는 봉고차 뒷자리에 서서 바둑 책을 보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저는 말없이 두는 바둑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최소한 바둑판 안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2학년, 바둑과 잘 맞았던 나


이미 또래 아이들은 물론 나보다 잘 두는 형조차 없었죠.

딱히 승리를 원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바둑판 앞에 말없이 오래 앉아있었을 뿐이죠.

빠르게 바둑 실력이 올랐던 저는 차를 타고 1시간 걸리는 도봉구의 한 전문 도장으로 가게 됩니다.



3학년, 바둑도장에서의 괴롭힘


전국의 날고 기는 아이들이 프로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러 오는 ‘바둑도장’

저보다 잘 두는 형들은 차고 넘쳤습니다.

여전히 소심하고 말이 없었던 저는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통통하고 귀엽게 생겼던(?) 저는 형, 누나들의 좋은 놀림감이었습니다.

별명으로 놀리기 볼 꼬집히는 건 매일이었고, 어떤 형은 자기 앞으로 와보라면서 작은 거울로 제 속옷을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죠.

또 당시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어떤 형에게 맞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 늘 말없이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바둑에 더 빠져들었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결국 풀어내는 성취감, 평소 연습했던 집 계산이 완벽하게 맞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최고였죠.



4학년, 승부욕이 없던 아이


어디서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린이 대회에서 전 예선 탈락을 했습니다.

나름 바둑 내용이 좋았다고 생각했고, 패배에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지 않았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아버지는 “넌 승부욕도 없냐?”라고 화를 내셨지만 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면 화를 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확실한 것은 바둑이 재밌었고,
바둑을 통해서 외로움과 아픔을 잊었다는 것이죠.



 5학년, 학교 선생님에게 체벌을 받다


당시 초등학교 생활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바둑도장에 나갔습니다.

이전까진 별문제 없이 조용히 다녔는데, 5학년에 들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학교 수업을 안 받고 바둑 도장에 가는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그런 저를 매일 혼냈습니다.

학교만 가면 교실 뒤에서 엎드려뻗쳐를 했고, “왜 학교에 나왔어!!”라고 자주 소리를 지르던 기억이 납니다.


방학 하루 전날 선생님은 저에게 “방학숙제 안 해오면 넌 두고 보자”라고 하셨고, 저는 학교를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습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죽고 싶어”

라고 말했더니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셨던 기억이 납니다.


6학년, 힘들었던 생활과 반대로 오르는 바둑실력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고, 말이 없었던 저는 우연히 형들과 PC방을 가면서 게임에 빠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게임으로 형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번 8강에서 탈락했던 제가 처음으로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당시 우승상금이 40만 원이었는데 사실 돈 보다도 그냥 우승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좋았었죠.

이 당시의 저는 바둑계에서 나름
인정받는 유망주가 되어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집에서 떠났던 날


여러 일을 겪고 저는 바둑도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겼던 바둑도장은 분당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집에서 도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죠.

저는 결국 바둑도장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전히 저는 바둑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냥 바둑을 해왔고,
다들 프로기사를 목표로 달리길래
저도 따라서 달렸을 뿐이죠.


슬슬 외로움과 아픔에도 무감각해져 갔습니다.

바둑은 ‘포커페이스’ 즉 나의 심리를 읽히지 않아야 유리합니다.

저는 스스로의 마음과 감정을 더욱 숨겨나갔습니다.

그렇게 꼬박 4년을 기숙사에서 생활했었죠.


고1, 프로가 되다


1년에 9명만 뽑는 프로기사 선발대회(입단대회)에서 저는 매번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2명을 뽑으면 3위를, 1명을 뽑으면 2위를 하는 사람이었죠.

저는 그냥 꾸준히 바둑을 두었고 고1에 연구생 내신점수 1등으로 프로 입단에 성공했습니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은 '된 건가..??'였습니다.

특별한 감흥이 없었죠.


공허해진 아이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프로가 되었지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표가 없어진 것이죠.


남들은 이기고 이겨서 대회 우승하는 것이 꿈이지만 저는 그런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바둑도장에 나가서 공부하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이 기뻤죠.

이 아이는 그 뒤로도 20년 동안 바둑만 해왔습니다.

단지 다른 것을 몰랐을 뿐이죠.



나에게 바둑이란


저에게 바둑이란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입니다.

자폐증을 앓던 아이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바둑이었죠.


저에게 바둑이란 선생님입니다.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제가 공부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꼭 이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외로움과 아픔을 잊게 해 주고,
바둑으로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에 부딪히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다지며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제가 바둑을 30년 동안 하는 이유이며 앞으로 살아갈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외로움과 아픔을 겪지 않게, 더욱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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