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그 아우라가 있다. 그 사람이 실제 어느정도의 능력이 있는지와 별개로 말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속아주는 듯하다. 만약 약간의 능력이라도 실제로 있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 믿는다.
ㅡ뭔가 있으니까 저러겠지.
타인에게 삶을 의탁하려는 사람들은 꽤나 많다. 자기 스스로 롤모델이 되기는 힘드니까. 같은 꿈을 이뤄낸 사람을 보며 가능성에 중독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자기의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은 많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마치 인생의 정답을 찾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확신이 강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자기확신적 언어는 양자를 움직여 물리적 세계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성공한 사람들이 종종 말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될거라고 확신했다고.
그런데 이런 것의 진위를 떠나 확신에 찬 태도 그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산다.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생각해보면 성공이란 별게 아니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 그게 성공이다. 사람을 모으면 성공은 따라온다. 사람들이 따르면 성공은 따라온다. (생각해보니 별거이긴 하다)
그런데 중앙값, 평균값은 성공할 수 없다.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하면서도 평균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욕망은 서로 상충한다. 일단 첫번째 욕망인 성공을 보자. 모두가 성공하고 싶어한다. 즉 모두가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갈망한다. 돈이 가장 큰 욕망같지만,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 역시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돈을 가지면 타인의 인정과 관심이 따라오기에 우리는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두번째 욕망인 평균이 되고 싶은 욕망은 어떤가? 사람들은 무난하고 평균적인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실 이 자체가 욕망이라기보다는, 평균에서 배제되고 싶지 않은 욕망이라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는 평균이 아니면 배척하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사회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보수적이다. 남과 다른 것에 너그럽지 않다.
정상가족이나 나이에 따른 발달과업이 대표적이다. 또 어떤 정체성은 비정상으로 취급받고 어떤 생각들은 미친 것으로 치부된다. 일명 상식이라 불리는 것들에도 역사적 맥락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 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한국사회는 여기에 써야하는 에너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왜 대체 누굴 위해서냐.
하지만 평균은 절대 흥미롭지 않다. 부정적으로 보일지라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궁금해지도록 만드는게 성공에는 중요하다. 근데 자기확신이 없으면 평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하는데 자기확신이 없다면 그걸 어떻게 밀고 나가겠는가?
확신에 찬 태도는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달라지게 하고, 그것이 그 사람을 특별해 보이게 만든다. 예전에 나는 그런건 가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무엇은 가짜 나인가? 이 물음은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그것을 넘어서는 물음이 필요하다. '진짜 나를 쫒는 것'이 답을 주지 않는다. 어느 단계까지는 답을 줄 수 있겠지만, 끝까지 ‘진짜 나’ 를 물고 늘어지다보면 남는 건 혼돈과 허무뿐이다. 무엇이 나인가? 다 나이다. ‘진짜 나’ 라는 것은 허상이다. ‘진짜 나’와 ‘보여지는 나’ 모두 나다.
예전에 나는 자기확신의 법칙, 일명 시크릿에 꽃힌 듯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듯 말했다.
“저는 잘 될거니까요.”
친구: 어떤 사업 계획하고 계신대요?
A: 000을 온라인으로 하는 아이템을 생각중이에요.
(중략)
친구: 아 근데 그게 그게 사업성이 있을까요?
A: 근데 저는 잘될거에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친구: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요?
A: ...........(횡설수설) 잘 될거예요.
친구: 아 그럼 지금 진행을 하고 계신건가요?
A: 요즘엔 이렇게 자기 사업 시작하시는 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시작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대화를 지켜보는 내 그는 짧은 시간에 자기는 잘 될거라는 말을 10번 이상 했다. 그 때의 감정을 기억한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남을 판단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지만 그만 저절로…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에 대한 나의 부정적 감정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기인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새롭게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여 만나고 다닌다. 이게 그의 요즘 일상이다. 나는 이런 것은 느낌만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업 시작을 위한 실제적인 노력없이 자기 확신의 언어만으로 노력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크릿은 이미 된 것처럼 말하고 스스로 정말 믿는 것이 골자라는 걸 안다. 그런데 시크릿에서 말하는게 이런건 아니지 않나? 나는 그가 도통 잘될 것 같지 않았다. 이처럼 나는 자기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뭣도 없으면서 입만 산 사람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항상 내가 비웃음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이 아니면 내뱉지 않았다. 나는 신중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궁금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친구 티몬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티몬은 나에게 어설프게 녹음한 자작곡을 들려주었다. 나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는데, 음질이나 보컬이 너무 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면인 나에게 이 어설프기 짝이없는 음악을 들려주며 자랑스러워서 한참을 떠들었다. 그 가사의 내용에 대해서, 자기가 믿는 가치에 대해서.
나는 티몬에게 엄청난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궁금해졌고 그 내용들에 설득되었다. 현재 어설플지라도 자기확신에 차 있는 티몬을 보며 나는 매력을 느꼈다. 어떤 인간인지 정말 궁금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비웃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설픈 개그에 웃어버려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랄까.
-뭐야. 노래도 잘 못하는 것 같은데 되게 확신에 차 있네.
티몬이 거만한 느낌은 아니었다. 비웃으면서도 나는 티몬을 궁금해졌고 계속 관심이 가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례가 내게 준 결론은 무엇인가. 나는 앞으로 비웃음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비웃음을 사도 괘념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사업준비생 A와 티몬을 둘 다 비웃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없는 것과 별개로, 설사 내가 비웃었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중간이 가장 최악값이다.
어떤 측면에서 나는 평균과 가깝고 어떤 측면에선 정규분포에서 벗어날 것이다. 벗어난 그것들을 평균으로 밀어넣지 않기로 다짐해본다. 대신 평균에서 벗어난 내 것들을 더 귀하게 여기기로 한다. 무난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기로 한다.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눈치보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그걸 입밖으로 과감하게 말하기로 한다.
당신이 무엇인가 진심으로 믿거나 생각한다면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어떤 형식이든 표현했을 때라야만, 나를 이상하게 보기는 커녕 되려 나를 궁금해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 말 안하고 있으면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자신을 누가 알아봐주길 기다리는 것 같다. 누가 나의 이 특별함, 고유한 감성을 알아채 주기를. 그러나 그런 건 없다.
이미 슈퍼스타가 된 사람이야 가만히 자기 할 일만 해도 이슈가 되지만, 보통 사람은 뭔가 끌어당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끌어당기려면 절대 평균값이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우리가 평균이 되려고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없는 이유이고 자기확신을 가지고 겉으로 드러내야 되는 이유이다.
나는 예전에 실력이 없는데 나서거나 표현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실력 역시 자기확신을 가진 사람이 늘 수밖에 없다. 경력자가 되려면 신입시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미래 역시 자기확신이 움직인다. 내가 하는 것이 의미있다, 특별하다는 자기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계속 그 일을 지속하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아무런 보상이 없는 시절을 거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라는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확신에 차게 되고, 그 사람은 현재와의 간극을 확신의 언어와 확신의 행동으로 채울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어차피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곳은 현재 뿐이다. 현재는 이미 보내진 것이다. (PRE-SENT) 그래서 확신할 수 있다. 이미 와 있는 것이니까.
확신을 가지고 살자. 그것이 미래를 움직이고 창조해버린다. 이미 있다. 현재는 이미 와 있다.
아 티몬과 사업준비생 A의 자기확신에는 차이가 있었다. 티몬과 A의 차이는 자기확신의 진심여부에서 왔다고 본다. 확신이 없어서 불안감에 자꾸 내뱉는 사람과 진짜 믿는 것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우린 그걸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