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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Oct 27. 2022

네 몸은 고깃덩이가 아니야

환원론적 시각의 문제점

칼로리를 계산하는 것, 몸을 분절시켜 부위별로 바라보는 것에는 환원론적 시각이 깔려있다. 

환원주의란 복잡하고 총제적인 개념을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하려는 입장이다. 이는 바람직한 사고방식이 아니지만 편하다.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합리적으로 보이기에 사람들은 종종 환원론을 채택한다. 

다이어트는 간단합니다. 1500kcal 먹었으면 1500kcal 소비하세요.
그럼 절대 살이 안쪄요. 

           

이처럼 무의미한 말이 없다. 당신이 1500칼로리를 먹었다고 여긴들, 그만큼 다 흡수되는 것도 아니다. 먹은 칼로리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그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가 얼마나 흡수되는지, 1500칼로리의 영양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는지, 먹는 순서는 어땠는지, 공복시간은 어땠는지, 당신의 장내 세균과 호르몬은 어떤지 등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요인에 의해 칼로리는 그 숫자 그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어플상에 1500이 입력됐으니 나는 1500을 먹은 것이고 이것은 내 몸에서 그대로 1500이 된다. 그래서 나는 1500을 소비하면 절대 살이 찌지 않는다. 


1시간 러닝뛰면 200kcal가 소모된다고 기계에 뜬다. 그러나 진짜 200kcal가 소모되었을까? 많은 요소들이 내가 소모하는 칼로리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마다 골격도, 장기의 성능도, 열대사도 다르다. 생리라는 것은 그렇게 분절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저 문장을 그저 "많이 먹었으면 많이 움직여." 정도로 거칠게 사용한다면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허나 저 문장에 사로잡혀, 저 숫자에 사로잡혀, 자신이 하루 먹을 칼로리를 정해놓고, 더 먹으면 자책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는 저런 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환원론적 시간은 우리가 우리 자신마저 분절시켜 보게 한다. 몸과 마음으로 나누는 이분법도 이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면서 몸만 통제하려고 하는 다이어트는 왜 필연적으로 실패하는가? 둘은 하나인데 당신이 나누어 생각해서 그렇다. 또 우리 자신을 고깃덩이마냥 부위별로 바라보게 된다. 


지방흡입을 하는 병원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 영화 시작 전에 광고가 엄청나다. 최근에는 허리의 필요없는 지방을 골반에 넣어 아름답게 보이라며, 여성들이 자기 골반너비까지 검열하는 눈을 띄어주었다. 


나는 너무나 기괴하여 사실 깜짝 놀랐다. 몇년 전까지는 그래도 뱃살 팔뚝살 다리에 있는 지방을 빼는 것 정도였다면 이제는 여성의 몸을 더 자세히 분절시킨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기준은 더 엄격해졌고, 이것은 비인간적이다. 남성의 몸은 이렇게 세분화시키지 않는다. 고깃집의 목살 삼겹살 항정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살아있는 돼지를 보고도 목살, 삼겹살이라고 나누지 않는다. 


나의 지방은 허리에 있으면 쓸모없고 골반으로 가면 쓸모있어진다. 이런 광고는 골반이 좁으면 여성적 매력이 없고 아름답지 않다는 메세지를 너무 강하게 던져준다. 평소 뚱뚱하다 말랐다 정도만 생각하던 사람마저 '골반'이라는 기준을 인식하고 사람을 보게 된다. 


언어로 존재하기 전에 그것은 존재하는게 아니다. 우리에게 인식되기 전에 그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나의 하체가 뚱뚱하다고 여겼다. 그 때 내 인식은 

-다리가 두껍다. 하체가 뚱뚱하다. 이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하체를 의식할수록,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볼수록, 하체에 대한 디테일한 기준이 잔뜩 생겨났다. 

일단 나는 엉덩이가 클 뿐 아니라 쳐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은 앞서 말한 껄껄이가 나보고 "넌 엉덩이가 쳐졌어."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이라면 *까하고 넘길 것 같다. 그러나 당시 나는 내 하체가 뚱뚱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말에 영향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내 엉덩이가 쳐졌다는 사실 때문에 바지를 입고는 거울로 항상 뒷모습을 살폈다. 누구나 당연히 있는 엉덩이 밑살이 두고보기 힘들만큼 싫었다. 어느정도 있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긴 옷으로 가리거나 덜 도드라지는 재질의 바지를 사려고 했다. 


또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해 말하는 걸 줏어 들으면서 하체를 보는 기준을 세분화해나갔다. 발목이 가녀린지, 종아리에 알이 없는지, 무릎 뒤 오금에 살이 없이 들어갔는지 그리고 무릎 위의 살이 없는지. 다리를 붙였을 때 허벅지 사이가 띄어지는지 등등.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각종 기준들은 이제  내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냥 통통하구나 라는 생각에서 나는 각 부위별로 토막내어 내 다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내 하체의 모든 단점이 인식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말하면 원인을 알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밉게만 보였던 당신의 하체, 그 원인은 쳐진 엉덩이, 두꺼운 발목, 두툼한 무릎살 때문이었습니다. 탕탕!!


가녀린 발목이라는 기준을 접하며 나는 다른 여자들의 발목과 내 발목을 보았고, 내 발목이 확실히 두껍다는 것을 인지했다. 무릎살이 두툼하면 다리가 둔탁해보인다는 얘기를 듣기 전에 나는 무릎살이라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무릎살은 지방흡입 병원 광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무릎 위 두툼한 살 때문에 당신의 다리가 둔탁해보인다며 그 부분을 콕 집어 샤넬라인이라고 했다. 오호 과연 내 무릎 위의 살은 상당히 두툼했다. 내 다리가 둔해보이는데 정말 한 몫을 하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까지 관리해야 하는 걸까? 남자의 몸은 이렇게까지 조각내지 않는다. 그냥 보통이다 통통하다 뚱뚱하다 정도이지, 그의 골반, 다리라인, 어깨라인, 팔뚝살 쳐짐, 발목의 두꺼움, 종아리와 허벅지 길이의 비율 등 따져서 보지 않는다. 


-오빠도 못생겼잖아요. 오빠 얼굴이나 생각해요.

나는 껄껄이가 왜 우리의 말을 듣고도 허허 넘겼는지 뒤늦게 알았다. 


그는 자기를 평가의 대상으로 생각해본적이 없기에 못생겼다는 말에 타격감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우리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평가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못생겼다 엉덩이가 쳐졌다는 말에 크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나는 예뻐야 하는 대상인데, 예쁘지 않다고 하니까.


평가의 주체는 자기 외모를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가 반려동물을 고를 때, 내가 못생겼다고 예쁜 반려동물은 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내 외모랑 내가 반려동물 고르는 거랑 상관없지 않은가.


나는 껄껄이 이와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자신은 여성의 외모를 평가만할 뿐, 자기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못생기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성매매업소에 간 이야기를 하고, 자기는 1억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결혼은 외국인이랑 해서 다문화 가정을 꾸려서 승진에 점수를 받을 거라는 얘기도 했다. 그에게 여성은 명백히 도구일 뿐이다. 


나는 정도의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껄껄이가 심각한 편이라고 믿고 싶다. 껄껄이는 여자를 같은 인간으로 보는게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럼 너네를 인간으로 보지 뭘로 봐. 인간으로 보는데? 

동등한 인간으로 본다는 것, 동등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본다는 것. 이게 무슨 뜻인지 껄껄이는 죽을 때까지 모를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들이 최소한 자기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알길 바란다. 

조각조각 분절내서 고깃덩이처럼 자신의 몸을 재단하지 말자. 환원론적 시각으로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말자. 당신의 기분과 감정을 논리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지 말자. 환원론을 논리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간편한 말에 넘어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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