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아 Oct 15. 2020

당신들의 정치는 괴롭다.



정치. 
문자 그대로 풀자니,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영국의 작은 마을인 캐슬 쿰에서 클래식하게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가던 형제 자매들.


언어가 민족의 역사 및 정체성과 그 결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특히나 사연이 많은 복잡한 체계다. 뜻이 고정되어 있는 표준어에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응축되어 있던 각종 애환과 집착을 마치 된장처럼 풀어낸다. 


그러니 단어는 하나일진대, 그 단어가 품게 될 의미는 모두에게 사뭇 다르다. 혹자는 한국말이란 자고로 끝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끝까지 들어도 끝까지 모를 수 있는 것이 한국말이기도 하다.

하물며 ‘다스린다’는 표현은 기나긴 임금들의 역사와 수 많은 전쟁과 내전 그리고 급박한 사회 변화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된 오늘날의 한국을 돌이켜 볼 때, 그 정의가 미루어 짐작해 수백수천 개에 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현대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이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범위를 고려해보면, 이와 관련한 담론을 풀어내기에 ‘정치’라는 말의 그릇 자체가 너무 작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서른이 된 내가 느끼는 우리네 정치는 정말이지 괴롭고 환멸이 나는 불쾌하고 지리멸렬한 연속체이다. 좌나 우 혹은 진보나 보수를 목적어로 두지 않고 ‘정치’ 자체를 기요틴 위에 올려버렸으니, 나의 말은 어쩌면 열성 정치분자들에겐 기계적 중립을 외치고 속세를 떠난 선비의 뒷모습처럼 비겁해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차라리 열정적 양비론에 가깝다. 양비론은 문장을 시작해 마침표는 찍지 않는 무책임한 기계적 중립과는 그 무게와 맥이 분명히 다르다. 교통 사고의 책임 배상 비율을 정할 때, 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제 3국의 입장에서 타국의 외교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모두 열정적인 양비론자가 된다.


발 디뎌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전적인 무결이나 흠결 같은 것은 원체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속의 갈등은 전혀 그런식으로 나타나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갈등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 쉬운 말로 정치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한국의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와 우를 합친 말을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거칠게 통칭한다면, 나는 그 프레임에 무척이나 지쳐 있으며, 이를 전혀 지지하고 싶지 않다는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그런 말은 전혀 정치적 입장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누군가가 기어이 나의 대답을 듣겠다고 목에 칼을 들이대며 정치적 이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두의 상식이 하나가 되는 세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간 기성 세대가 조직해 온 정치적 프레임은 나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표현보다도 이상적인 면에서만큼은 가히 몇 수 위에 있다. 한국의 정치적 프레임은 이상과 가치 그리고 정의에 대한 해석과 담론들이 지나칠 정도로 서로 섞이고 또 흩어져 있어, 무엇이 진보이고 보수인지를 가늠하는 것 조차 무척 어렵다.


바빠보이는 차들과 업무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과 달리, 구름의 모양과 속도는 애석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여유롭다.





이념적 기치가 아닌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이뤄지는 특유의 패권 다툼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곤란하고 피곤하게 만든다. 애초에 인위적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정치적 이념들은 불변하는 이상향 같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한 개인이 절대 그 이념의 대표값이 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서로의 네거티브를 중심으로 한 대표 인물 위주의 정치는 시민들의 머리 속에 사고의 프레임을 만드는 척 모양새를 잡지만 동시에 어떤 지성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모순적인 모습도 취한다.


A를 비판했을 뿐인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B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어 있는 한국의 파리한 정치 현실은 이제 이보다 더 피곤해지기도 어렵다. 두 가지 색 밖에 없는 크레파스를 들고 선 황량한 도화지 위에서, 정책에 관한 담론들도 길을 잃는다. 길을 빼앗긴다고 표현하는 편이 실상에 더욱 근접할 것이다.


합리적인 발의와 정책은 발의하는 자의 도덕성 논란으로 인해 그 정당성을 잃는다. 기실 둘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독립적 영역임에도 말이다. 좋은 정책은 통과시키고, 그의 자질 논란은 추후에 다시 다루면 되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철폐해야할 것 같은 현행 정책들은 이것이 애초에 기치로 걸었던 정치적 이상향 덕에 질기고 무의미한 목숨을 유지해나간다.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하면 나는 그런 이상향을 바라지 않는 회색의 인간이 되어있다.





미디어는 젊은 이들의 낮은 투표율에 대해 개탄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지만 작금의 무너진 정치 현실의 원인을 20-30대의 낮은 투표율로 변명하는 것은 40대 이상의 어른들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우스운 꼴이다. 낮은 투표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총체적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더불어 그런 인물들을 후보랍시고 옵션으로 던져주면 아마 20-30대의 투표율을 높이기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작년과 정치적 이념이 180도 다른 후보를 내보내면서, 입체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기대하는 것은 도둑질과 사기에 근사하다.




정치인들의 평균 연령도 너무 높다. 새파랗게 젊은 정치인이 존재만으로 이슈가 된다는 것 자체가 구태에 의연한 정치의 현실을 비춰준다. 긴 세월이 반드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정답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청년은 아둔하고 모든 노인은 지혜로워야 할 것이다.


조금 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그른 것에 대해 진영을 가리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진영을 가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전에 내가 누구를 선택했는지가 아니라 나의 합리가 공공의 상식선에서 얼마나 어긋나있는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헤겔의 주장이 무색하게 한국의 정치 체제는 정이 반이 되었다가 그것이 합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정이 된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그것도 나름대로 합이라고 침을 튀겨가며 주장하겠으나, 철학에 무지몽매한 이들은 이것을 두고 또 다시 ‘정!’이라고 외칠 것이었다. 눈에 띄는 의식적 발전이나 변화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엔 오직 끝 없이 반복되는 원의 운동만 있을 뿐이다.




이전 09화 얼리어답터의 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