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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2. 2020

얼리어답터의 나라



아침부터 부장님 자리가 분주하다.



막상 부장님은 출근도 안하셨는데, 주변에 다른 남직원들이 무척 흥미롭다는 듯 기웃거리고 있다. 부장님 책상에 웬 택배 하나 올라와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유~다들 내 자리에서 뭐하셔?


산타가 준비한 선물을 아이와 함께 발견한 부모의 톤이 그러했을까. 왜 다들 모여있는지를 모를 수가 없는 부장님은 괜스레 평소보다 톤을 높이셨다.


- 자, 보자 보자 보자~


영롱한 박스 안의 주인공은 접을 수 있고 화면도 큼지막해서 활용도도 높고 필기하기도 쉬운 새로 출시된 태블릿 PC였다. 반짝이는 자태에 옆자리 대리와 막내 신입까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기계치인 나는 당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어휘들을 구사해가며 이 태블릿이 가진 기능과 기술에 대해 쉴 새 없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금요일마다 있는 아침 회의에 딱이겠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자 부장님은 구매할 때부터 그 생각을 했다고 답하셨다.



영국에서 찍은 두 직장인. 비가 그친 영국의 길과 너무 어울려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업무를 하는 척 하며 웃으며 대화들을 흘리다, 나도 모르게 이 짧은 대화만은 머리 속으로 수차례 되새김질하게 되는 것이었다.


생각해볼수록 참으로 거슬리는 말이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서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는 옆자리 선배가 산 아파트 가격이 1년 만에 그의 2년 치 연봉에 가까운만큼 올랐을 때 느꼈던 심정으로, 지금의 것과는 하등 다른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긴 스스로에 대한 불만인가? 혹은 자격지심? 그러나 내 업무용 책상을 정말 오랜만에 3인칭의 관점으로 이리보고 저리보고 또 둘러보아도 이 불쾌한 감정에 대한 별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을 돌리니 그제서야 김 대리의 반짝거리는 새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서 지급한 의자가 허리에 무척 불편하다며,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브랜드에서 얼마 전 거금을 지불하고 들여 온 그 만의 애마였다. 그 옆자리 신 주임의 책상에는 불빛이 어스름하게 새어나오는 가습기 하나가 올려져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있었는데, 사무실 공기가 너무 탁하다며 투덜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의 불편한 마음은 바로 이 통일되지 않은 소비들의 집합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실무적으로 큰 의미를 찾기 힘든 형식적인 회의에, 와이셔츠를 입은 일꾼들은 으레 무엇이라도 적는 사회생활을 해야한다. 회의 시간에 무엇인가를 적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독립운동 내지는 항의 시위에 가깝다.


30분, 그러니까 1800초 내내 두뇌에 자극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회의를 매 주마다 견뎌가며, 나는 업무 수첩에 그간 수없이 많은 사각형과 형태가 일그러진 동그라미, 아니 차라리 타원에 가까운 형상들을 그려왔다. 이만하면 추상화가로서의 기본적 입지는 꽤 다진 편이다. 출품은 다음 생에 할 생각이다.




회의에 무언가 하나라도 적어야한다는 이상하고 비영양가적인 문화만 없다면 부장님이 선택이 조금은 부장님의 취향 쪽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혹은 아예 이 태블릿 PC가 아니라 조금 더 윤택한 삶을 위한, 부장님의 행복만을 위한 소비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이사진이 직원들의 허리에 조금만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척추가 눈치를 봐야하는 약하디 약한 플라스틱 조각이 뒤쪽에 아슬아슬하게 기생하고 있는 조악한 의자에 앉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김 대리도 조금 더 나은 소비를 했을 테다. 에어컨 유지 및 관리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다면, 신 주임도 보다 행복한 또한 본인을 위한 소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속한 곳에만 한정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직원으로서의 요구는 혹은 인간으로서의 요구에 대한 직업 문화는, 아직은 부당하게 연차를 쓰지 못하거나 연봉이 삭감되는 경우의 정도에만 그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다. 회사 차원에서도 우리의 행복이 더 높은 효율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텐데...참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어두컴컴한 새벽에도 피어난 벚꽃은 가로등의 모든 불빛을 받아낸다.



2주 정도 지나고 난 뒤에,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그는 호강에 초 쳤다며 나를 내려보고는 혀를 끌끌찼다. 주방에서 하루 종일 불과 함께 요리를 해야하는 녀석이니, 나는 너의 말이 맞다며 그냥 수긍해버렸다.


요새 젊은 애들은 너무 편하게만 일하려고 해.

라는 결코 젊은이 같지 않은 말도 기어이 내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구상에서 여성이 처음 투표를 시작한 지 채 150년이 되지 않았다. 어제의 많은 것들이 촌스럽고 조악한 것으로 남고, 또 많은 새로운 내일들이 항상 우리의 대문을 노크한다. 작금의 직원 복지 혹은 업무 문화가 세상 가혹한 혹평을 받을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그 비웃음의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당신,

그냥 몰래 사각형이나 그려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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