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4월 즈음, 총선이 있었다.
어른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관례였던 우리는 밥먹는 자리나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 가리지 않고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돌이켜보니 어른들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학회와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나서 학교 앞 작은 치킨 집에서 왁자지껄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에, 당시 나와 꽤 친했던 선배는 날 포함해 서너 명 정도를 데리고 2차 회동을 가졌던 것 같다.
- 야, 이번에 너네 어디 찍었냐?
주문한 오뎅탕이 채 나오기도 전에 선배가 대뜸 물었다.
그런 시기였고, 그런 우리였기에 그 질문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 아이, 형 또 이상한 얘기 하려고.
- 술이나 마셔요 선배!
동석한 친구들은 선배를 만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치 이야기는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선배의 대표적인 주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 저는 OO당 OOO 후보 괜찮아 보여서 그냥 그 사람 찍었어요.
술도 안 마셨는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도화선이 나와버렸다.
이를 도화선이라 표현한 이유는 OO 정당이 선배가 평상시에 틈만 나면 노골적으로 힐난하던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한 번 이 선배랑 이 문제로 얘기나 좀 해봐야겠다, 하고 벼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나는 마치 떠밀린 관중처럼 그렇게 콜로세움 안쪽으로 들어왔다.
- 뭐? OO당?
선배는 가늘어진 정신을 가다듬고 일장연설이라도 하려는 듯 술이 아닌 물 한 컵을 들이켰다.
- 야, 너 얼마전에 과외 하나 그만둬서 좀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지 않았냐?
아무리 가까운 남이라고 해도 힘든 얘기 만큼은 털어놓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어른들의 지혜가 정확히 일치한 순간이었다. 그 때를 즈음으로, 나는 선배의 질문이 폭력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 OO아, 봐봐. 투표는 말이야, 내가 뭘 지향하는가! 이런 거 다 의미없는 거거든 사실. 이런 거는 경제적으로 접근해야 되는 거야. 봐, OO당이 우리 불쌍한 대학생들 책임져 줄 것 같아? OO당이 아직 취직 못한 사람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 챙겨주겠어? OO당은 서울에 집 있고, 경기도에 빌딩 있는 사람들 위하는 정책 펴는 당이야. 나는 가진 거 없는 사람들이 OO당 찍어주는 게 진짜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거든, 정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들을 좋아했던 선배는 가끔 그렇게 마르크스의 주장과 현실세계의 어려움이 괴상한 비율로 섞인 말들을 자랑스럽게 하곤 했다. 평소였으면 '전국민이 그런 식으로 투표하면 세상이 잘도 나아지겠다'며 한두 마디 정도는 덧붙였을 나는 그냥 잠자코 선배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 장소에서,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같이 핏줄 세워 목청을 높여봤자 잘 쳐주어도 자기 만족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대답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 맞았다.
그 자리가 유독 나의 기억 속에 지금도 인상적인 순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나 말고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친구가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 학과지만 교양 수업과 동아리 활동을 통해 무척 친해진 동갑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강남에서 자라왔다. 놀랍게도 나는 이 사실을 2학기가 끝나갈 무렵에서야 알게 됐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내가 부유한 사람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외형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학교에 그의 아버지가 대학 입학 기념으로 선물해주신 차를 갖고 오지도 않았고, 가까운 집을 두고서 부득이 부유한 자취방 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다녔던 그는 저렴한 SPA브랜드에서 내가 입는 것과 비슷한 기본 아이템들을 입고 다녔다.
가장 의아하면서도 놀라웠던 점은 외면적인 모습 말고도 그의 말과 행동에 일체의 거만함이나 우쭐거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는 어려운 동기에 대한 배려심을 가진 친구였다. 동아리에서 함께 놀러 갈 계획을 세울 때도 예산의 범위가 대학생에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는 가장 먼저 나서서 이를 제지하곤 했다.
물론 그가 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겠지만, 그는 부라는 것이 사람이 가진 인간미나 도덕성의 표준과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백마디 말보다 삶의 여러 자세를 통해서 나에게 가난하다고 정의로운 것도 아니며, 부 자체가 해악도 아니라는 가장 간단하고 어렵지 않은 진실을 알려주었던 셈이다.
가난한 혹은 가난했던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벌이신 투자가 아버지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집이 무척 어려워졌던 경험이 있던 나는 일견 이 문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아버지가 잘못하셨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필 그 시기가 가장 예민한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였다는 점이 나의 인생에는 조금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
가난이 반드시 수반하게되는 현실적인 고통과 좌절은 이를 겪은 사람들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아픈 기억의 편린들을 만들어낸다. 아팠던 순간은 치유되지 않고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덮여있어서, 언제든 뚜껑을 열면 추악한 고개를 들고 심연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 지워지지 않는 편린이 가난의 미덕과 부의 악덕이라는 괴상한 대척점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있다. 부는 상대적인 것이기에, 나는 일생에서 본인이 부유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다. 어림 잡아도 국민의 8할은 본인의 부가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었다.
정치인들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8할의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편이 정권을 잡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정치적 생리에 대해 무척 명석하다.
그래서 그들은 투표 시기만 되면 '민생'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아픈 국민들의 필요와 수요를 집요하게 조사하고 쑤시고 또 파내서 온 천하에 보란듯이 전시한다.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어보고, 생선 가게 할머니의 손을 잡고, 연탄을 날라본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낮은 자들의 삶을 포용할 수 있는 과정으로 쓰일 수 있음도 전혀 아니다.
가난을 그냥 가난으로 두는 것은 어떨까.
가난은,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것 만큼이나 옆에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가난은 그냥 가난일 뿐이다.
딱 그만큼 고달프고, 딱 그만큼만 사람을 설명해준다.
한 사람이 부하게 되고 또 가난하게 되는 과정에는 오만 가지 사연이 달라붙기에, 어쩌면 이는 서로를 잘 알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