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우 씨!
아무리 설명서를 읽어도 텐트의 끝자락을 어떻게 고정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길이 들지 않은 어색한 나의 손을 애써 거부하는 텐트의 꼴이 영 심상치 않다.
낑낑대며 노력하는 날 기만하듯, 기어코 텐트의 끝자락이 어긋나며 우스꽝스럽고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짜증이 올라온다.
한숨 쉬며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거리에 관리 안 한 수염이 듬성듬성한 아저씨가 텐트 설치를 이미 마치고는 작은 의자에 앉아 쉬고계신다. 그에게 텐트 설치의 지혜를 구하려 한 발짝을 옮겼다가, 이내 그만둔다.
그래도 명색이 내 취미인데... 없어 보이게 남에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캠핑은 이제 시작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나의 새로운 취미생활이다. 취미의 2, 3단계, 혹은 ‘준’전문가 단계 까지는 꼭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이 거대한 텐트를 구입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 합리나 필요도 들지 않았다. 취미가 캠핑인 사람들의 삼분의 일은 이 텐트를 구입했으니 나도 따라 구입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운 처사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나. 거대한 텐트는 거대한 지식과 거대한 노동을 요구했다. 또 다시 취미를 그만 둘 ‘그’ 시기가 도래했음을, 나는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맘때쯤은 항상 모든 것이 재미없어졌다. 자문을 구하던 커뮤니티도, 즐겨찾기와 캡쳐를 해두었던 용품들도 이제는 접을 때가 된 것이었다.
‘취미’란 것이 이 세상에 없었더라도 내가 이렇게 살았을까?
몇 년에 걸쳐 스스로에게 던져 온 질문을 또 다시 주억거린다. 쉼은 이게 무슨 놈의 쉼. 정말이지, 텐트의 모양새를 한 헬스가 따로 없다. ‘헬스’하니 4년 전에 구입해 지금은 집에서 먼지만 머금고있는 아령과 덤벨들이 머리 한 켠에 스쳐 지나간다.
진정 내게 필요했던 것이 과연 ‘쉼’이 맞는가도 싶다. 직장으로부터의 일탈은 필요했지만 이제 30대 초반에 들어서는 나에게 해먹이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플라스틱 의자가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으레 캠핑이란 것이 그러하고, 또 나의 최근의 관심이 캠핑으로 향했으니 내가 걸어온 1년의 발걸음은 어떻게 보면 이미 정해져있던 것이기도 했다.
고민을 이어가다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뜀박질이었다. 직장에서의 뜀박질 말고, 조금 더 자유롭고 목표 의식도 부재한, 그리고 무엇보다 방향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편안한 뜀박질 말이다. 그제서야 나는 왜 내가 텐트 안에서는 절대 행복을 찾을 수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어디까지고 행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야 하는 취미에게, 나는 스스로 도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주말마다 이런 날들을 보내고 직장에 복귀해왔으니, 그간의 인생이 얼마나 숙제같았을지 짐작이 간다. 특히 힘들었을 나의 월요일들에게 또 하나의 애도를.
하나의 취미에 평생 목매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일방향적인 열정이 때로는 퍽 부럽기도 했다. 무엇하나 진득하게 10년 정도 붙잡고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나이기에 그랬다.
내 열정은 항상 연탄처럼 타오르기보다는 성냥불처럼 타들어갔다.
퇴근 시간은 빠른 편이라 평일 저녁마다 시간은 남는 직장인. 그럼에도 남들처럼 아주 분명한 취향은 없는, 조금은 불행해 보이는 나에게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취미들이 인터넷과 라디오를 통해 찾아올 것이고, 귀가 얇은 나는 또 이를 덥석 물 것이다. 한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이제 취미에 대한 고민이 취미가 아닌 나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아예 취미를 고르는 것을 취미로 삼기로 했다.
단, 나의 욕구와 수요에 대한 무한한 고민을 통해서 말이다. 취미가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고 또 어떤 ‘쉼’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정답은 으레 그렇듯이 또 다시 ‘나’였다.
적당한 정도까지 즐기곤 지겨워지자마자 그만둬 버리는 것,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취미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