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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6. 2020

뭐야, 수염이야?






‘엥?...이거 뭐야, 수염이야?’


분명히 아침에 꼼꼼히 면도를 하고 나왔는데, 거울에 비친 나의 밋밋한 턱선 아래로 새까맣게 긴 수염 한 가닥이 보란듯이 이질감을 뽐내고 있다.


‘남자가 웬 손거울?’이라는 말을 죽기보다 듣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업무용 책상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곳 한 켠에 거울을 위한 세를 주고 있었다. 그런 부당하고 악랄한 대우를 견디고도 작디작은 거울은 정말 고맙게도 오늘 제 역할 이상의 할 일을 해주었다.



시간은 아직 모두가 업무 정리에 바쁜 오전 9시 5분.

분명 나를 본 이보다는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이 많다.


설령 일부와 마주쳤다고 한들, 그들은 내 턱에 있던 수염은 고사하고 내가 어느 쪽 손으로 안경을 들어올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턱 안쪽으로 휘어져 있는 이 놈은 수염의 시작부분부터 특유의 유려한 곡선을 취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덕에 매일 아침마다 이루어졌던 맹렬한 면도날의 숙청으로부터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뭐, 이유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당장 목이 댕강 잘려야 할 운명의 악당에게 죽어야 할 이유를 이러쿵 저러쿵 설명해봐야 예상치 못한 반격과 변수만 생길 것이었다. 내가 본 영화에선 항상 그랬다.


하루 빨리, 아니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한다. 목과 어깨가 조금 결리는 것 같다고 느껴, 방심하고 조금이라도 목을 드는 순간 나는 그 날부로 모두에게 업무보다는 수염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아 왜, 그 턱 아래에 수염 하나 애완동물처럼 길게 키우시는 분 있잖아요.” 

턱에 붙어있는 수염 자식이 입을 히죽이며 능청스럽게 비꼬는 것만 같다.




모든 업무를 잠시 중단하기로 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의 자아는 이런 상황을 위해 핀셋을 가져다 둘 정도의 준비성이 있는 위인은 안되었다. 큼지막한 형광색의 사무용 가위가 먼저 눈에 들어왔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옆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은혜 씨는 괴상한 자태로 턱을 향해 가위날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수염도 충분히 억울한데, ‘가위남’으로 유명해질 수는 없다.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나 가위를 챙겨 화장실 거울로 직행하려다, 그것도 그만두었다.


우연찮게 변기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온 김 부장님이나 이 대리를 만나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오전 9시 직장의 화장실은 항상 만원인 경우가 허다했다.


필시 김 부장님은 가위를 들고 본인을 쳐다보고 있는 날 보면서, 얼마 전 부서원들에게 크게 소리쳤던 때를 떠올리실 것이다. 그리곤 금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미안하다고 연신 사죄할 것이었다.




차라리 한 번 뽑아보기로 했다.

대충 턱을 매만지며 과도한 업무에 대해 고민하는 척 순식 간에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면, 이 수염의 존재란 자고로 세상에서 오롯이 나만 알고 있는 작은 악몽으로 끝날 것이었다.



“핫..!”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전혀 안뽑혔다.


무의미한 고통의 전율이 입술까지 전해져 파르르 떨었으나, 나는 꿋꿋이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반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수염은 오히려 더 튀어나온 것만 같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잘라낼 수 밖에 없는 수염이었다.

잘라낸다해도 앞으로 이 자리에선 수염이 계속 자랄 것이었고, 뽑아도 동일할 것이었다. 두 선택이 만들 결과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면, 뽑는 행위로 인한 나의 고통은 잉여적인 지옥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이번의 뽑기와 차후에 있을 뽑기는 모두 독립시행이기에, 다음 뽑기의 고통이 마침내 환희로 바뀔지, 혹은 나에게 두 번째 지옥을 선사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었다.




그렇지 변기! 

김 부장님께는 미안하지만 김 부장님에 대한 상념은 변기의 효용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라면 가위가 문제인가? 나는 내 수염을 위해 전기톱을 가져가도 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김 부장님을 만나면 괜스레 변기가 떠오를 것만 같다.


가위를 챙겨 주머니에 넣고, 턱에 힘을 잔뜩 준 채 나는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세 번째와 일곱 번째 칸이 비어져 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일곱 번째 칸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있는 모든 운을 긁어모아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거친 나는, 흉물스러운 수염의 목덜미에 차가운 가위날을 들이밀고 마침내 군주를 능멸한 역적을 잘라냈다. 화장실 바닥으로 힘 없이 떨어지는 그 놈을 향해 나는 조소와 함께 조용한 쾌재를 불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변기와 가위 그리고 내 자신을 의식하게 되며 순식간에 휩싸이는 위화감으로 인해 나의 자아와 자존감은 잠시 바닥과 하이파이브를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업무에 복귀했다.


정말이지, 그 날따라 모든 업무가 다 내 편 같았다.




일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와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는데 바지를 보니 허벅지 뒤 쪽에 시퍼런 바지의 색깔과는 보색 관계에 있는 영롱한 주황색 얼룩이 동전 크기만하게 묻어 있다.


이 놈은 또 언제부터 있던 것일까...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 분명 오늘 생긴 얼룩은 아니라는 것을 친절히도 알려주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사는 것인지, 바지를 빨래통에 던져 넣으면서 나는 굳이 대답을 찾고 싶지는 않은 질문을 함께 던져보는 것이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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