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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7. 2020

동해바다로 가자!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다.”


- 자전거 여행(김훈) 中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풍경이 사물로서 무의미한 것에 상관 없이, 사람은 풍경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자신만의 장르를 써 내려간다. 결국, 무엇이든 남겨야 하기에 비로소 인간이다. 김훈 작가도 자전거를 타며 바라 본 자연과 여러 상념들을 그의 글 속에 무척 정갈하고 아름답게 써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재첩에 대한 그의 묘사는 글에서 재첩의 향이 느껴질만큼 훌륭하다.



한반도는 대륙의 큰 물줄기로부터 보란 듯이 고집을 부리며 부득이 튀어나와 있는 작은 땅이다. 그 좁은 땅에, 참 멋진 풍경들이 그렇게나 많이 모아져있다. 남한과 북한이 수십 년간 주장해온 기실 있지도 않은 선으로 인해 이제는 절반의 땅이 밟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지만, 본래 자연에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솔잎과 나이테 그리고 능선과 강줄기 따위가 있을 뿐이었다.


철책선이 놓인 북쪽 한강의 흐름을 따라 파주 통일 전망대 쪽으로 악셀을 밟다보면 몇십 년간 관리되지 않은 강과 둑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드넓은 녹지대의 풍경은 어쩌면 전쟁을 통해서야 전쟁의 흔적과 무관해진다. 풍경은 그렇게 조용하고 꾸준하게 인간이 없는 서사를 써내려간다.


이와 달리 우리는 마음 속 일렁임을 일으키는 거대한 풍경을 두고 으레 문학도가 되는데, 장르는 보통 다짐류의 자기 계발서나 실연으로 인한 희곡 혹은 사랑을 속삭이는 로맨스다. 내게는 동해가 그랬고, 그간 써왔던 장르도 참 다양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에게 '동해바다'라는 글자는 그렇게 읽히고 들릴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존재만으로 훌륭한 서사가 된다. 강릉에서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왜 '동해바다'라고 쓸까?


동해의 '해' 자도 분명 바다일진대, 이에 의미 중복이라는 차가운 이름표를 붙이기에는 퍽 서운한 것이었다.

외교 문제를 떠나 모두의 추억과 기억 속에 동해는 분명 고유명사다. 3면이나 바다로 둘러쌓여 있지만 바다는 외려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어쩌면 가장 희소하고 가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동해에 도착해서야 들숨 만큼 쉼 없이 들이치는 파도에 대고 무어라고 소리를 뱉어내지만, 동해는 그들이 없는 순간에도 모래에 소금을 주었다가 금세 다시 나가서는 전혀 새로운 소금을 끝 없이 가져오곤 했다.


동해는 입이 없기에 말을 건네지 않는다. 들을 귀도 없는 동해는 사람들의 오만가지 사연과 감정을 특유의 깊은 어둠 속에 녹여내고는 듣지 않았던 것으로 만든다.


어떤 물줄기가 동해가 되고 남해가 될지 또 서해가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정되지 않을 것이지만, 사람들은 다만 각자가 선 위치에 맞추어 어떤 것은 남쪽의 것이라 칭하고 또 다른 것은 서쪽의 것이라 칭할 것이었다.





"오랜만에 동해바다나 갈까?"


이는 어쩌면 의문 보다는 대답이나 다짐에 근사하다. 혹여나 의문이 있거든 동해에 가서 각자의 대답을 찾아오면 될 것이었다. 서울과 경기도 근교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도중에 주어지는 1박 혹은 2박의 자유는 종종 다른 곳보다도 동해를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저마다 마음에 품은 동해는 각기 다르겠으나, 나에게 동해는 속초부터 강릉까지다.


서울을 출발해 운전이 조금 지겨워질 때를 즈음으로 춘천과 대관령을 지난다. 마침내 강릉으로 향하는 2차선의 도로를 타면 바다로의 길이 막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호수가 된 경포대를 돈다. 주차를 하고 모래가 섞여 있는 솔잎의 언덕을 지나고나면, 비로소 자잘자잘한 모래들 사이로 첫 번째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이 나에겐 항상 동해의 시작이었다. 물리적으로 강릉이 나에게 남긴 것은 분명 음식일텐데, 일상 속에서 이따금 떠오르는 것은 동해에서만 들렸던 특유의 파도소리와 일렁임이었다.


동해의 가을은 1년의 흐름 속에서, 또는 하루의 시간 속에서도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온다.

저녁놀이 저만치 없어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면, 바닷바람은 이제는 돌아가라는 듯 매섭게 차가운 공기를 끼얹는다. 그때를 즈음으로 청춘들의 폭죽 소리도 시작되니, 바다를 보러 온 이들은 이제는 까맣게 보이지 않는 파도의 놀음을 배웅 삼아 저벅저벅 제자리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동해로 가는 길. 하루를 포기하기로 하고 대관령에 있는 풍력 발전기 근처로 가면 이렇게 은하수를 볼 수 있다.






한 번도 동해가 나에게 이렇다 할 답을 준 적은 없다.


동해는 말조차 건넨 적이 없으니, 김훈 작가의 말대로 동해는 그저 사물로서 무의미하게 그 자리 그대로 서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동해는 언제라도 내가 부채 의식 없이 찾아갈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마음 속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 사이가 으레 그렇듯이, 우리가 항상 꼭 누군가의 대답을 바라면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답이 없기에 더욱 의미있는 소통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동해는 얼마나 소중한 상담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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