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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Oct 14. 2020

부장님, 저 오늘 반차 쓰려고 합니다.




- 김 대리 오늘 일찍가나보네?

- 아 예, 오늘 부장님께 말씀드리고 반차 좀 쓰려고 합니다.

- 왜? 어디 아파?

- 아뇨, 은행 업무를 좀 볼 게 있어서요.

- 집 알아보러?

- 아뇨, 그냥 저...개인적인 업무차...

- 그래~내일까지 아까 말한 보고서만 좀 보내줘요.

- 예, 알겠습니다.



...



똑똑.


- 부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 네, 김 대리. 괜찮아요, 어서와요.

- 예, 부장님. 저...다름이 아니라 오늘 반차를 좀 쓰려고 합니다.

- 반차? 무슨 일 있어요?

- 아 예, 저 은행 업무를 좀 봐야할 것 같아서요.

- 은행 업무요?

- 예, 그렇습니다.

- 그렇구만~은행 업무!

- 예...그...대출 때문에 직접 은행에 가서 알아봐야 하는 게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 오, 김 대리 드디어 집 사실려고?

- 아, 그런 건 아닙니다.

- 그럼 갑자기 대출은 왜?

- 예?...예, 그게 저...

- 아니에요~조심히 잘 다녀와요.

- 예, 감사합니다. 들어가보겠습니다!



...



흔하디 흔한 여의도의 야경 사진. 야경은 직장인이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서류는 말로 할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을 보다 정밀하고 세밀하게 다룬다. 말은 그것이 존재하는 형식에 따른 제약으로 인해 당사자들이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 있지 않을 경우 성립이 불가하다.


많은 것들이 문서화되고 전자시스템을 통해 처리되면서 일상의 편리함은 늘었다. 말 한마디 없이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거나 배달 어플을 통해 음식을 주문하고, 심지어 많은 서류와 동의의 과정이 오고 가야하는 대출 업무조차도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보다 편리하고 당연한 보편이 되었다.


충분히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서른인 내가 느끼기에 현대 한국 사회는 이러한 문화적 변화를 생각보다 무척 적극적으로 포용한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축약되거나 사라진 의사소통의 대부분은 사실 애당초 우리의 삶에 그렇게 꼭 필요하거나 유의미한 소통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은 실로 강력하다. 문화는 스스로를 생성한 뒤 이를 다시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조용하지만 거대하고 영속적인 파동을 만든다. 하교를 하고난 뒤, 퇴근을 한 이후에, 그리고 집안일을 마친 후에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각자의 처지에 맞게 문화라는 야간 학교에 다시 등교하고 있는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가 단 하루 새에 급변하지는 않으므로 대부분의 시민들은 으레 TV와 인터넷 앞에만 앉아 있어도 충분한 양의 문화적 변화들을 자연스레 체득한다. 이십 년 전에 찍은 사진에 담긴 패션에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누군가 TV에 나와 어떤 스타일의 옷이 촌스러운지 부득이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오늘 옷장에서 골라야 할 옷과 조만간 버려야 할 옷 정도는 알고 있다.




특유의 눈치 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이 붙는다. 문화적 변화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동반자로는 각종 법적 규제들과 제도들이 있지만, 기실 이것은 이미 문화적으로 자리 잡은 보편적 현상을 성문화된 도구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이를 한 명만 낳는 문화는 어린이 보호구역의 확장 보다 훨씬 앞선다.


이에 발맞추어 직장의 많은 것들도 전자화되었다. 기존에 종이로 된 서류에 직접 직인과 날인을 찍어 처리하던 업무들을 온라인 상으로 대체하기도 하고, 퇴근 할 때는 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허름한 퇴근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네모 디스플레이에 그냥 내 왼쪽 엄지를 한 번 꾹 눌러주면 된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통념과 의식의 현주소가 헌법이나 노동법 등의 성문화된 법문에 곧장 새겨지는 법이지만, 그러한 법 조차도 문화라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하나의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한 손에 카드를 쥐고 흔들어 대면서, 현금만 받겠다는 식당 주인과 큰 소리로 실랑이를 벌일 사람은 현저히 적을테니 말이다.



구름이 음표처럼 전선위에 걸린 것 같아 찍었다. 장소는 기억나지 않음.



반차와 연차를 쓰는 것은 노동자로서 내가 가진 응당한 권리이지만, 사실상 응당하다는 형용사는 이 문장에서 겨우 형식만 갖춘 무소음에 가깝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로 응당 내가 가진 권리였다면 나는 필요 이상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수상한 사람이 보여 경찰을 불렀다고해서 나에게 왜 아는 형님이 아니라 하필 경찰을 불렀느냐고 되물을 사람은 없다. 이 사람과 왜 결혼을 하는지, 왜 하필 다른 집을 놔두고 이 집을 고른 것인지에 관해 나는 국가에게 하나도 소명하지 않는다. 육아 지원금을 조금 지원 받는다고해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전반적인 자녀 양육 방향과 계획을 설명할 부모도 아마 없을 것이다.


회사 업무가 진정 체계적으로 전자화되었다면, 그리고 노동법 상에 나와 있는 노동자로서의 나의 권리가 이 땅에서 온전하게 실현된 실체에 근거하고 있다면, 대면상으로 나의 근태 상황을 설명해야 할 이유는 사실 하등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업무의 전자화와 노동법 개선이 사용자의 편의가 아닌 노동자의 편의에 근거한 변화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다소 비약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런 비영양가적인 문화적 파동은 회사 내에 이미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업무 문화라는 커다란 파도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면상으로 보고한 뒤 종이로 기록을 남겼던 근태 관리가, 대면 보고도 거치고 전자상 결재 처리도 해야하는 괴상한 형태로만 바뀐 셈이었다. 그것이 내가 쓸 수 있는 응당한 권리였다면 이는 구구절절이라는 부사와는 양립할 수 없었어야 했다. 다른 나의 모든 권리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연차 사용에 관한 사유 란에 ‘그냥. 오늘은 일하기엔 영 기분이 별로니까.’ 라고 쓰는 나를 상상해본다. 나는 나를 무척 잘 알기에 이런 일이 평생 내 인생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상상을 넘어서는 지점까지는 걷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나의 빈약한 심연에는 소시민이라는 이름의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나도 이런 문화에 조금씩 일조하고 있는 하나의 너트나 볼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겠다.


최근 들어 많은 회사에서 소위 ‘꼰대’ 문화가 사라지긴 했지만, 그것은 시민 전체 의식의 함양이나 사회 정의의 회복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이는 꼰대 같지 않은 상관의 급증으로 인한 문화적 눈치의 역할이 더 크다. 이를 사회 정의의 회복이나 전체 의식의 발전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이는 차라리 설명보다는 서술에 준한다. 문화만 다시 바뀌면 언제든지 이전의 삶의 양식으로 돌아갈 의향이 있는 상관들이 한국엔 분명 무척 많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한반도에서 신분제가 반강제적으로 혁파되고 난 후에도 신분과 위계는 문화적으로 끈덕지게 그 양식을 존속시켰다. 역사 시간에 연도와 함께 배웠던 신분제의 폐지는 실제가 아닌 기념비로서만 그 역할을 다한 셈이다.


신분적 평등을 법령 상으로 보장했던 법은 당시 문화적으로는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양반은 법이 제정된 전과 후가 다르지 않게 여전히 ‘천한’ 것들의 등짝을 지팡이로 후려쳤다. 법은 성문화된 언어로서, 일정 기간 동안은 거대한 문화적 변화가 만든 부산물로서만 기능할 뿐이었다.


현대에 이른 노동법도 개정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회적 부딪힘을 먼저 겪었을 것이다. 다만 역사는 그것들의 총체를 문화적 변화의 시초가 아닌 개인적 일탈의 집합체라고 부를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딪혀 이마를 으깨가면서 마침내 문화를 바꿔내고 노동법 개정에까지 이르렀을테지만, 역사는 문화에 따른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제도적 변화에 따른 문화 변동을 서술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겨우 서른인 나조차 많은 사회적 변화를 체감할 정도라면 근래 들어 강산이 바뀌어도 정말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제도와 문화에 항거하는 숭고한 개인이 받아 낼 메달이 끽해야 돈키호테 정도에 머무는 일 만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다못해 나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은 계속해서 열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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