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삶의 일부
파리 16구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집 근처에 작은 성당이 있었다. 성당에서는 분기별로 벼룩시장을 열었다. 벼룩시장이 열리면 동네 주민들이 많이들 찾아왔다. 아이들 장난감 및 동화책도 저렴하게 많이 판매하고 있었는데, 부모들이 줄을 서서 사갈 정도였다. 비교적 깨끗하고 질이 좋은 장난감과 동화책은 금방 동이 나기 때문에 입장 시작 전부터 미리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 또한 집 옆에 있는 성당 덕분에 이곳에서 아이 장난감 및 동화책을 여러 권 구매했다.
성당 안에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허름한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한창 아이와 집에서 지낼 때라서 이곳 성당 도서관에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한 번은 자녀 4명을 키우는 이웃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 집에는 만 3세부터 만 10세까지 아이들 4명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거실에 책이 없었다. 각자 방에 책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고 했다. 한국은 거실에 전집이 쫙 배치되어 있는 것을 종종 봤다. 아이가 태어나면 책을 많이 읽히기 위해 전집부터 산다. 하지만 이곳 프랑스는 소위 전집 문화가 없다. 책을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보고 싶은 책을 사서 읽는다. 다 읽지도 않을 전집을 사서 집에 데코레이션 하는 집은 거의 없다.
프랑스 시민들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네 공공 도서관과 벼룩시장에 드나들며, 읽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읽고 자연스레 책과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형성된 독서 습관은 삶의 일부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힘이 된다.
기나긴 팬데믹을 겪으면서 프랑스인들의 삶에 있어 책의 의미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프랑스는 2020 3월부터 2021년 5월에 이르기까지 총 3번의 전국 봉쇄령이 시행됐다. 그 당시 학교도 문을 닫을 정도로 심각했는데, 서점과 도서관은 열게 해 달라는 시민들의 빗발친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식품점 및 약국처럼 서점과 도서관은 필수 업종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은 지치고 힘든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독서는 삶이다(Lire, c’est vivre)”라고 외쳤다. 그만큼 프랑스인들에게 독서란 먹는 일만큼이나 삶에 있어 필수적이다. 프랑스 문화부(Ministère de la Culture)에서 2015년에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전국에 등록된 공공 도서관(국공립 및 지자체 등)은 약 16,300곳이다. 이는 프랑스 국민의 80% 이상이 이용 가능한 공공 독서 공간이다. 그중, 프랑스 국립도서관(BnF)과 공공 정보 도서관(BPI)은 문화부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운영된다.
우리 가족은 동네 도서관인 뇌이쉬르센 롱샴 메디아테크(Médiathèque Longchamp Neuilly-Sur-Seine)를 자주 찾는다. 이곳은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으로서 책뿐만 아니라 CD, DVD와 같은 각종 음반 및 영상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도서관이라는 뜻의 비블리오테크(Bibliothèque) 대신 매스미디어 자료관이라는 메디아 테크(Médiathèque)라고 불린다. 물론 책도 다양하게 소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서 셀린 씨에게 시민들이 어떤 책을 주로 대여하고, 어떤 연령층이 주로 오는지 물어봤다.
"프랑스인들은 책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소설을 가장 많이 대여하고, 그다음으로 정치, 역사 관련 서적을 주로 찾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책을 대여해갑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각 연령층이 고르게 옵니다. 특히, 이번 3차 봉쇄령 때는 모든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어린이들과 학생들도 많이 와서 책을 대여해갔습니다.”
◆ 뇌이쉬르센 롱샴 메디아테크(Médiathèque Longchamp Neuilly-Sur-Seine) 전경 ⓒ모니카 박
◆ 사서 셀린(Céline) 씨와 봉쇄령 기간 도서관 운영, 시민들의 책 대여 관련, 프랑스인들의 독서 문화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모니카 박
◆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 모습 ⓒ모니카 박
책을 대여하러 왔다는 7살 에밀은 “학교에 가지 않는 3주 동안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아요”라고 말했다. 에밀은 팬데믹 전에는 부모님과 함께 도서관을 찾아 동화책 코너 바닥에 앉아서 다 같이 책을 읽곤 했다. 동화책 코너에는 나이별, 외국어별로 책이 구분돼 있으며, 아이들이 손쉽게 책을 찾아볼 수 있도록 책이 담긴 여러 상자를 바닥에 진열해 놓았다.
일상을 되찾은 도서관의 모습은 활기로 넘쳐난다. 매주 동네 주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 있다. 성인들은 독서 토론 시간을 가지고, 아이들은 연령에 맞춰 책 읽기 시간 및 책으로 게임하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구성되어 있다. 만화를 즐겨보는 프랑스 독서 문화에 맞춰 만화 이벤트도 자주 열린다. 동네 도서관은 그야말로 우리 동네 놀이터다.
최근 도서관에서 열린 행사를 찾았다가 재미있는 문구가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제목은 독서의 권리이다. 어떤 권리인지 들여다 보니, 읽지 않을 권리, 발췌독 할 권리, 완독하지 않을 권리, 여러번 읽을 권리, 어떤 책이든 읽을 권리, 어디에서든 읽을 권리, 어디에서든 읽을 권리, 소리내어 읽을 권리 등이 적혀 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책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읽어야 하며 꼭 공부와 연결시키기 보다는, 책과 독서는 삶의 한 부분이자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즐거움의 한 요소라는 생각이 강한 편이다. 이것이 독서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프랑스는 대형 서점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 독립 책방이 많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을 넘어 책을 매개로 책방지기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지성을 나누는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책에는 서점 주인의 코멘트가 담긴 쪽지가 함께 붙어 있다. 책을 매개로 서점 주인과 서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매년 시행되는 전국 단위 문학 행사인 겨울의 ‘독서의 밤(Nuits de la Lecture)’과 여름의 ‘책으로 떠나자(Partir en Livre)’는 모든 사람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린다. 로즐린 바슐로(Roselyne Bachelot)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독서를 '위대한 국가적 대의(Grande cause nationale)'라고 선언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삶에서 책과 독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서관에 붙어있는 '제6회 독서의 밤' 공식 포스터 ©모니카 박
◆프랑스 전역과 해외 곳곳에서 제6회 독서의 밤 행사가 열렸다. 숫자는 행사가 열린 곳을 의미하며, 홈페이지에서 행사장 정보를 알 수 있다. ©프랑스 문화부 독서의 밤 공식 홈페이지
2022년 1월 22일 토요일 저녁(현지 시각), 독서의 밤 행사에 동참하기 위해 롱샴 미디어 도서관(Mediatheque Longchamp)을 찾았다. 이곳에서 열리는 아동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는데 <오 레 파뜨(Haut les Pattes)>라는 책을 소개하며 책 내용을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연극으로 재미있게 구현했다.
팬데믹 상황인 데다가 저녁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약 1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부모와 함께 이곳을 찾은 만 3세~만 6세 정도 되는 아이들 약 70명 정도가 아동극을 관람했다. 아이들은 무대 앞에 깔아 둔 매트 위에 편안하게 앉았다. 첫 장면에서 무서운 탈을 쓰고 나타난 여우를 보자, 만 3세 정도 되는 아이 한 명이 울기 시작하더니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울어 극장 안이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여우가 곧 사라지고 그 후로 재미있는 장면이 계속 연출되자 아이들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시종일관 깔깔대며 연극을 신나게 관람했다.
연극을 보러 온 엘리즈 씨는 저녁을 먹고 아이 둘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도서관이 집 근처에 있어서 저녁이지만 쉽게 올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재미있는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 도서관에 왔다고 말했다. 만 7세~만 10세가량 되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도서관의 다른 장소에서 진행 중이었다. 성인들을 위한 독서 교육 프로그램도 열리고 있었다.
◆<오 레 파뜨(Haut les Pattes)>라는 동화책을 바탕으로 한 아동극 ©모니카 박
◆서부극 콘셉트로 도서관을 꾸며놓았다. 사서들도 카우보이 복장을 착용하고 시민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모니카 박
2022년 4월 22일부터 24일, 3일 동안 열린 파리 국제도서전(Festival du Livre de Paris)은 말 그대로 축제 현장이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2021년, 2020년 2년 동안 개최하지 못한 파리 국제도서전은 1981년 첫 회를 시작으로 올해 40회째를 맞이했다. 1,000명의 작가 및 300개의 출판사 참여, 1,200건의 사인회 진행, 4,000명의 학생 단체 참가, 3일 동안 약 90,000명의 입장객 방문 등 수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 축제를 만끽했다.
프랑스 국립 도서 센터(CNL)가 2021년에 발간한 '프랑스인과 독서'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최소 한 권의 책(전문적인 독서와 아이들에게 읽어준 책 제외)을 읽은 프랑스인은 86%를 차지했고, 지난 한 해에 한 사람당 평균 18권(종이책 15권, 전자책 3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권에 진입한 책을 비교해보면, 한국은 부동산 및 주식같이 돈과 관련된 책과 자기 계발서가 많은 편이지만, 프랑스는 다양한 장르의 소설이 상위권 대부분을 차지한다. 만화책도 인기가 많다. 프랑스인들이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목적성보다는 재미라는 요소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지난 한 해 동안, 최소 한 권의 책을 읽은 프랑스인은 86%이며, 프랑스인 한 명당 평균 18권(종이책 15권, 전자책 3권)을 읽었다. ⓒ프랑스 국립 도서 센터(CNL)
◆ 프랑스인들에게 인기 있는 서적은 1위가 소설, 2위가 실용서 및 취미서, 3위는 역사서, 4위는 만화로 집계됐다. ⓒ프랑스 국립 도서 센터(CNL)
한국은 소위 ‘책 육아’가 트렌드로 자리 잡아, 어릴 적부터 책을 읽는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학교 성적도 좋다며, 아이가 태어나면 값비싼 전집으로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워서 아이가 책을 많이 읽도록 한다. 이는 책 읽기가 교육 시장에서 또 하나의 경쟁이 되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하기 쉽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공부, 성적 및 대학 진학과 연관 짓기보다는 자유롭게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환경을 각 가정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 갈 때, 우리는 독서의 진정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